충전중

by 이루체

새벽 한 시. 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12%.


화면이 켜지면서 알림이 하나 떴다. "최적화된 배터리 충전." 지금 다 채우지 않고, 내가 일어날 시간에 맞춰서 100%를 만들어 놓겠다는 뜻이다.


내가 일어날 시간을 이 기계가 안다. 내가 알려준 적 없는데. 매일 같은 시간에 알람을 끄고, 같은 시간에 화면을 켜니까 알아낸 거겠지. 그 정도로 나는 매일 같은 하루를 살고 있다는 뜻이다.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베개가 차갑다. 이 감촉이 하루 중에 제일 좋은 순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 회의가 있었고, 메일을 보냈고, 누군가한테 "넵"이라고 답했다. 몇 번이었는지는 기억 안 난다. 점심은 먹었나. 먹긴 먹었는데 뭘 먹었는지가 안 떠오른다. 그런 식이다 요즘. 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니라 증발하는 느낌. 손에 쥔 적도 없는데 이미 없어져 있다.


저녁에 샤워하고 나왔을 때 거울에 비친 얼굴이 좀 낯설었다. 피곤한 건 아는데 저 정도인 줄은 몰랐다. 눈 밑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거울을 오래 안 본 사이에 어딘가 줄이 하나 늘었다. 물기 묻은 얼굴을 수건으로 눌렀다. 닦은 게 아니라 눌렀다. 그게 맞는 표현이다.


분명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빠지는 게 있다. 어디서 새는 건지 모르겠다. 잠을 자도 돌아오지 않는 것. 주말을 통째로 누워 보내도 월요일 아침이면 이미 바닥인 것. 새는 곳을 찾으려면 일단 멈춰야 하는데, 멈출 수가 없으니까 계속 새는 채로 걷는다. 걷는다기보다는 끌려간다. 알람이 울리고, 지하철이 오고, 메일이 쌓이고. 그 흐름 안에 서 있으면 멈추는 게 오히려 더 어렵다.


가끔 생각한다. 사람한테도 잔량 표시가 있었으면. 이마 한쪽에 숫자가 떠 있으면. 그러면 적어도 억지로 웃지는 않아도 될 텐데. 7%짜리 얼굴로 "나 괜찮아"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근데 아마 있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다. 3%짜리들끼리 모여서 서로 괜찮냐고 물어보겠지. 괜찮다고 대답하겠지.


충전기를 꽂아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자고 일어났는데 하나도 안 차 있는 아침. 그런 날은 이불 속에서 한참을 못 움직인다. 안 움직이는 게 아니라 못 움직이는 건데, 그 차이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설명할 상대도 딱히 없고.


폰은 내일 아침 일곱 시 반에 나를 깨울 거다. 내가 매일 그 시간에 일어나는 걸 아니까. 그리고 나는 또 같은 하루를 살겠지. 폰이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베개가 어느새 따뜻해져 있다. 처음 누웠을 때 그 차가운 감촉은 이미 없다. 좋은 건 금방 사라진다.


요즘은 60%쯤 되면 감사할 것 같다.

그것도 욕심이겠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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