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체 씨는 어릴 때 '하회탈'이라고 불렸습니다.
초등학교 때 붙은 별명이에요. 루체 씨는 그 별명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어요. 하회탈은 할아버지 탈이니까요. 하지만 루체 씨가 웃으면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고, 그 얼굴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체 씨는 하회탈을 자기 캐릭터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친구들도 아마 루체 씨를 잘 웃는 친구로 기억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의 루체 씨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초승달 같은 눈웃음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요.
루체 씨의 부모님은 루체 씨를 밝고 맑은 아이로 기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루체 씨도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알았어요. 그래서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동네 어른들에게도 인사를 잘하는 착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루체 씨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도 인사를 먼저 건네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든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횡단보도 앞에서 아는 얼굴이 보이면 신호가 바뀌어도 건너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봅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이웃을 마주치면 왔던 통로를 되돌아갑니다. 아마 지금의 루체 씨를 알게 된 사람들은, 루체 씨가 굉장히 소극적이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금의 루체 씨는 소극적이고 소심한 사람이 맞아요. 다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밝고 맑았던 루체 씨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루체 씨는 중학교 때 주로 반에서 3등 안에 드는 학생이었습니다. 특별히 머리가 뛰어났다기보다는 성실했어요. 숙제를 빼먹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주변 친구들도 공부를 하는 편인 아이들이었어요.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루체 씨는 중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는 다른 고등학교로 배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루체 씨는 낯을 가리는 편이었어요. 입학 첫날, 교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이 이미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 안에 루체 씨가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어요. 루체 씨는 비어있는 자리 중에 가장 뒤쪽, 가장 구석에 앉았습니다.
그때 옆자리에서 먼저 말을 걸어준 사람이 있었어요.
"야, 너 이름이 뭐야?"
지금부터 그 친구를 H라고 부르겠습니다.
H는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농담을 잘했어요. 루체 씨는 유머라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H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점심시간마다 H 옆에 앉으면 가만히 있어도 웃을 수 있었거든요. 루체 씨한테는 그게 중요한 일이었어요. 남들 앞에서 재미있는 말을 할 줄은 모르지만, 적어도 웃을 줄은 아는 사람이라는 것. 그게 루체 씨가 그 무리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으니까요.
루체 씨는 자연스럽게 H의 친구들과도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중학교 때 싸움을 하던 친구도 있었고, 일찍부터 화장을 하던 친구들도 있었어요. 루체 씨가 중학교 때 어울리던 아이들과는 분위기가 좀 달랐습니다. 하지만 루체 씨는 그걸 나쁘게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H와 H의 친구들은 루체 씨에게 친절했으니까요.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 저들에게는 오히려 내가 재미없는 사람으로 보일 거야.
돌이켜보면 루체 씨는 그 무리 안에서 늘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조용히 웃으면서 맞장구치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그게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루체 씨는 당시에는 몰랐어요.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으니까요.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 되었습니다.
루체 씨는 평소대로 독서실에 틀어박혀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독서실은 루체 씨에게 편안한 장소였어요. 모두가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고, 누구도 루체 씨에게 말을 걸지 않으니까요. 공부를 하다 보니 참고서를 학교 책상 서랍에 두고 온 사실이 기억났습니다. 학교에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어요.
루체 씨는 H에게 참고서를 빌리러 가기로 했습니다. H는 루체 씨에게 공부를 배우고 싶다며 같은 독서실에 등록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H의 자리는 옆 열람실이었습니다.
자리에 찾아갔는데 H는 오늘 독서실에 오지 않은 모양이에요. 자리가 비어있었고,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습니다.
루체 씨는 H의 사물함을 열어 참고서를 꺼냈습니다. 같은 과목이니까 같은 참고서를 쓰고 있었거든요. 시험이 끝나면 바로 돌려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자리로 돌아와 공부를 했습니다.
이때 루체 씨가 H에게 문자나 전화 한 통이라도 보내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루체 씨는 보내지 않았어요. 내일 학교에서 말하면 되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시험 기간이라 머리가 참고서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었거든요. 루체 씨는 원래 그런 부분이 좀 어두운 사람이었어요. 자기가 뭔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주변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일에 서툴렀습니다.
그 서투름이 이렇게까지 큰일이 될 줄은, 루체 씨도 전혀 몰랐습니다.
시험이 끝났습니다.
루체 씨는 한동안 독서실에 가지 않았어요. 곧 여름방학이었지만 어차피 고3이니까 공부만 할 테고, 그러기 전에 친구들과 놀기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습니다. 참고서도 돌려줘야 하는데, 그건 학교에서 만나면 주면 되겠지 싶었어요.
그런데 H가 이상했습니다.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었어요. 전화를 걸면 받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시선을 피했어요. 루체 씨는 무슨 일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습니다. 혹시 시험을 못 봐서 기분이 안 좋은 건가, 하고 며칠을 그냥 넘겼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루체가 도둑질을 하는 습관이 있대.
루체 씨는 처음에 자기 얘기인 줄도 몰랐어요.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귀에 들어왔을 때, 설마 했습니다. 하지만 소문의 출처는 H였어요. 루체 씨가 멋대로 참고서를 들고 가는 바람에 그 과목 공부를 하지 못해서 시험을 망쳤다는 이야기가, 반에서 반으로 퍼지고 있었습니다.
루체 씨는 당황했어요.
그날 H는 독서실에 오지도 않았는데. 참고서는 펼쳐본 흔적도 없이 새 책처럼 깨끗했는데.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루체 씨에게는 없었습니다. H의 친구들에게 해봤자 소용없었어요. 그들은 단지 H와 친하기 때문에 루체 씨에게 친절했던 것뿐이었으니까요. H의 적이 되어버린 순간, 루체 씨는 하루아침에 모든 친구를 잃었습니다.
루체 씨는 사과를 하고 싶었어요. 다른 이유야 어찌 됐든 참고서를 말도 없이 빌려간 것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H는 더 이상 루체 씨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교실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H는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복도에서 H와 마주쳤어요. 루체 씨는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이든, 오해를 풀고 싶다는 말이든, 무엇이라도.
하지만 루체 씨의 입이 열리기 전에 H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지나가면서 내뱉듯이, 마치 별것 아닌 말처럼.
불쌍해서 같이 놀아줬더니 진짜 친한 줄 아나 보네.
H는 루체 씨를 보지도 않았어요. 옆에 있던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웃는 중이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루체 씨를 향한 것인지, 그냥 지나가다 중얼거린 것인지조차 모호하게. 그래서 더 잔인했어요. 정면으로 말했으면 차라리 반박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스쳐 지나가면서 던진 말이라 루체 씨는 받을 수도, 피할 수도, 되돌려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맞았습니다.
수업 종이 울렸어요. 루체 씨는 복도에 서 있었습니다. 반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반으로 들어가면 H가 있을 텐데, 그 공간에 발을 디딘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지각 종이 울리고, 복도에 아무도 없어지고 나서야 루체 씨는 느릿느릿 교실 뒷문을 열었어요.
아무도 루체 씨를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루체 씨가 늦게 들어온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아팠어요.
다음 날부터 루체 씨의 책상 서랍에는 가끔씩 이상한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뭉개진 빵. 다 먹은 과자봉지. 녹아서 흘러내린 아이스크림 껍질.
물론 루체 씨가 먹은 것은 아니었어요. 누가 넣었는지 루체 씨는 보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교실에 도착하면 이미 서랍 안에 들어있었거든요. 사물함에도 비슷한 것들이 쌓였어요. 루체 씨는 매일 아침 서랍과 사물함을 확인하고, 쓰레기를 꺼내서 버리고, 물티슈로 닦았습니다. 조용히.
아마 H의 소행이었을 거라고, 루체 씨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H의 친구들만이 아니라 반 아이들 중 그 누구도 루체 씨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루체 씨가 버젓이 앉아있는데도 일부러 근처에 와서 루체 씨의 험담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마치 루체 씨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니, 보이지만 사람이 아닌 것처럼.
루체 씨는 그 말들을 들으면서 시선을 교과서에 고정시켰습니다. 글자가 하나도 읽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을 거기에 붙여두었어요. 빨리 수업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루체 씨가 H에게 더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루체 씨는 그러지 못했어요. 어쨌든 원인은 자신이 멋대로 빌려간 참고서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또 H와 맞서는 게 무서웠기 때문에. 두 가지 이유가 양쪽 발목을 잡고 있어서, 루체 씨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바보처럼.
방학이 끝났지만 루체 씨는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루, 이틀 지각이 늘었어요. 현관문 앞에 서면 손잡이를 잡은 손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겨우 학교에 도착해도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웅웅거렸고, 교과서의 글자는 자꾸만 흐려졌습니다.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반에서 3등 안에 들던 루체 씨의 성적은 중위권으로, 그리고 중위권 아래로, 그리고 그보다 더 아래로 미끄러졌습니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루체 씨에게 말해주었다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어. 참고서를 말없이 빌려간 건 실수였지만, 그 실수가 이런 대가를 치를 정도로 중대한 건 아니었어.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렇게 말해주었다면, 루체 씨는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았어요.
루체 씨는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무단결석이 늘어나니까 그제야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루체 씨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왠지, 그 일들에 대해서 말을 하면 누구든 루체 씨를 비난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게 왜 말도 안 하고 남의 물건을 빌려갔어? 그게 빌린 건지 훔쳤다가 들키니까 돌려준 건지 어떻게 알아?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루체 씨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백 번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입을 열 수가 없었어요. 루체 씨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괜찮아요"라고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