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3년 4월 30일 토요일 **시 *5분에 태어났다. 나는 내 위로 두 명의 언니를 둔, 세 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 시절엔 병원에서 출산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아이의 건강을 살피다 생후 몇 개월이 지나 출생신고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식의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4월생인 나를 굳이 1월생으로 출생신고 하셨고, 덕분에 나는 7살에 학교를 들어가 82년생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지금까지도 나의 학교시절 친구들은 모두 82년생들이다.
몇 해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이 있다. 그렇다. 나는 ‘김지영’과 이름의 모음하나만 다른 ‘83년생 김ㅈ영’이다. 그 책은 나와 같은 시절을 산, 이름도 흔한 이 시대의 여성 ‘김지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나는 83년 4월 30일 그날, 셋째 딸을 낳고 미역국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김ㅈ영’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그 시대의 남성, 아버지였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죄罪였다. 태아의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XY 염색체를 모두 가진 남자의 몫이 분명했음에도, 세 번째 아이도 여자아이가 태어난 것에 아버지는 매우 실망하셨다. 아버지는, 세 번째도 딸인 자신의 자식을, 저기 어디 입양기관에 보내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훗날 내가 성인이 되어 엄마를 통해 들은 이야기이다.) 그것이 홧김에 한말인지, 진심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지금 합정동에 위치한 아동회의 이름을 콕 집어, 그곳에 보내라고 하셨다. 엄마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며, 본인이 이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는 못한다고, 울며불며 아버지를 말리셨다. 아버지는 며칠 뒤 나의 출생신고를 하셨고, 그 와중에 굳이, 학교를 일찍 들어가게 하기 위해, 4월생인 나를 1월생으로 신고하셨다. 아버지의 속내는 이제와 알 길이 없으나, 지금 나의 집 근처인 합정동을 지날 때면, 그 곳을 한번 눈여겨 보게 된다. 엄마가 백혈병 투병중일 때, 내가 이 이야기를 우스갯소리 하듯 말하자, 엄마는 ‘그 말을 하지 말걸, 너한테 그런 말을 굳이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하시며 후회하셨다.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다 지난 옛이야기일 뿐인데, 엄마는 나에게 괜한 상처라도 주신 것 같으셨는지 마음 울적해하셨다.
결과론적으로 나는 그 집에서 셋째 딸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엄마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고, 아들을 낳기 위해 외도를 하셨다. 엄마는, 갓 스물을 넘긴, 아버지의 자식을 임신한 여자에게, 그 아이를 지우라며 돈을 쥐어줘야했다. 잘못은 아버지가 했음에도, 엄마는 그 일로 아버지에게 또 폭행을 당했고, 아들을 낳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무엇이 죄인가. 엄마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신의 가슴을 치며 아파해야 했을까.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내 동생으로 드디어 아들을 출산했고, 그 덕인지, 아버지는 내가 크는 동안 나를 예뻐하셨다. 나는 셋째 딸로서 퇴근하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고, 아버지 무릎에 앉아 재롱부리며 귀엽고 애교 많은 셋째 딸 노릇에 충실했다. 아버지의 폭행과 폭언으로 엄마의 몸과 마음은 멍투성이였으나, 엄마는 훗날 말씀하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언니들보다 널 특히 예뻐했어. 그건 사실이야. 가끔 언니들은 혼내면서 회초리도 때리고 하셨는데, 넌 한 번도 때리지 않으셨어.’ 그러고 보니 내가 아빠에게 맞은 기억은 없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진심으로.
내일은 나의 생일이다. 만으로 41살. 엄마 없이 맞이하는 4번째 생일이다. 40살이 넘어가니, 생일은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좌표정도로 생각될 뿐이고, 특별히 기쁘거나 감사하거나 그런 감정은 없다.
2015년 봄, 벚꽃이 만개했던 그날, 엄마의 유방암 항암소식을 의사에게 전해 듣고 병원을 나와, 벚꽃나무 밑 바위에 앉아 서로 부둥켜 앉고 울었던 그날이, 나의 생일이었다. 2020년 4월, 엄마의 골수검사결과, ‘골수이형성증후군’이었던 엄마의 병이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진행되었음을 의사에게 전해 들은 날도, 나의 생일이었다. 엄마는 본인이 울며불며 지켜낸 자신의 셋째 딸과 함께, 생의 청천벽력을 함께 맞이했다. 셋째 딸을 낳고 한숨과 눈물뿐이었겠지만, 그 딸과 함께여서, 청천벽력의 그 순간에 조금 덜 외로웠을까.
나의 생일은, 내 엄마를 위로하는 날이다. 또, 또, 또, 세 번째 딸을 낳았던 엄마에게, 미역국도 못 먹고 밤새 울었을 나의 엄마를 기억하며, 그렇게 지켜낸 나의 생을 감사하며, Happy Birthday.
*** 나의 아버지를 욕되게 할 맘은 없다. 나는 그저, 내 엄마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한숨은, 이 글을 쓰는 나의 몫이다.
아버지,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날 지켜줘서 고마워.
83년생 김ㅈ영, 41년 동안 이만큼 살아내느라 애썼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