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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May 12. 2024

네가 고생이 많다

말의 힘이란 참.




비 오는 아침이었다. 괜히 기운도 없고 축축 처져서 딸을 배웅하고 난 후엔 잠깐 누워 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따릉. 단잠을 깨우는 벨소리에 놀라 보니, 아버님이셨다. 응? 이 시간에 전화하실 분이 아닌데 싶어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오늘 오전 중에 주민센터에 가서 기한을 넘긴 농업인수당을 신청해야 한다는 게 용건이었다. 시부모님은 사천에서 딸기 농사를 지으시는데 연세가 더 드시면 진주로 나올 요량으로 아버님만 우리 집으로 주소지 변경을  해 두어 일처리를 우리 동네에서 해야 했다. 더군다나 하루 차로 기한을 놓쳐 온라인 신청은 더더욱 안 되는 터였다.

걸려온 전화가 다짜고짜 ‘진아 네가 가서 이것 좀 해라.’ 였다면 아무리 시어른의 부탁이라도 나는 분명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전화가 대개 그런 식이었으니. 그런데 연세가 드시니 꼿꼿하던 아버님도 누그러지시는 모양이다. 내가 여쭤야 할 안부를 내게 먼저 물으시고, ‘내가 오늘은 너무 바빠 나갈 수가 없는데 혹시 네가 오전 시간에 많이 바쁘지 않다면...’이란 전제를 깔고 부탁을 하셨다. 평소라면 전화를 끊고도 미리 말씀하지 않고 급한 부탁을 한 것에 짜증이 나 남편에게 씩씩거렸을 나다. 그런데 왠지 들어드리고 싶었다. 전화를 끊으시며 “진아 네가 고생이 많다.” 하셨기 때문이다. 짜증스러운 맘이 녹는 말이었다. 이 한 마디에 추켜든 마음이 수그러졌다.


그러고 보면 말이란 게 얼마나 힘이 센 지 모른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는데, 요즘 내가 오히려 이 말의 힘을 간과하고 지냈던 게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서 얼마나 짜증스럽고 부정적인 말을 많이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한 일은 어떻게든 좋게 포장하고 싶었겠지. 오늘은 내가 피곤해서, 아파서, 바빠서... 등등 온갖 핑계를 대며 가족들에게 내뱉은 말과 한숨을 기억한다. 무심코 툭 던진 말인데 ‘짜증 좀 그만 내’란 말을 자주 들었던 걸 보면 내 말버릇이 참 나빴던 거겠지?

다정한 사람이 되기보다, 다정한 말을 내뱉는 사람이고 싶다.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누군가의 말에 움직이고 싶듯이, 누군가의 마음을 다정하게 흔드는 말을 어제보다 더 많이 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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