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못다 한 이야기

헤어짐은 여전히 힘이 드네요

by 임루시아




연애시절 이후에는 손편지로 내 마음을 전달했던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너무 고마운 마음에 꾹꾹 눌러쓴 두 장의 편지. 그 글자들에 박히는 아쉬움이 여느 때보다 컸던 나의 편지와 그 밖의 일에 대한 이야기다.



여전히 잠이 고픈 아이를 깨워 전날 저녁에 정성껏 다려 둔 고운 한복을 입히고 몇 번을 매만진 머리에 댕기를 두르는 것으로 차비를 마친 아침이었다.


나는 헤어지는 것에 아직, 너무 서투른 사람이다.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나를 딸아이는 꼭 닮았다. 그런 아이가 쑥스럽게 웃어주고 함께 있으면 즐겁다고 한 사람은 손에 꼽기 힘들었으니 지금 내가 글로도 보내드려야 하는 이 분은 어쩌면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분이다.

성체를 건네주실 때 외엔 루시아라는 내 세례명보다 나린이 엄마로 더 많이 불러주셨던 본당 신부님께서 3년 임기를 마치시고 우리 본당을 떠나시게 되었다. 감사하단 말로 어찌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만 송별 미사에서만큼은 최대한 따뜻하고 정중하게 인사하고 싶었다.

지난 시간 신부님께서 우리 본당 신자들과 함께 한 활동 영상을 보는데 어머, 주책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화동을 맡은 딸아이가 신부님께 꽃을 전달하고, 신부님께서 신자들에게 인사 말씀을 건네시는 내내 아, 뭐지… 울컥 뜨거운 것이 목을 치밀고 올라왔다.



성인이 되어, 그것도 결혼을 하고서야 종교라는 것을 갖게 된 내가 코로나라는 핑계를 넘어 성당에 발 붙일 수 있게 해 주신 분이셨다. 오롯이 3년을 처음 함께 보낸 신부님이시기도 했다. 신자 수가 많은 본당에서 꾸역꾸역 주일 미사만 드리던 나와 딸아이를 주님 말씀의 뜰로 인도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


네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세 식구가 주일마다 예비자 교리를 들으러 다녔던 몇 개월, 가까스로 말씀 안에 머무는 시간은 내게 늘 평온이었다. 혼자 크는 아이가 안쓰럽기도 했고, 신랑의 권유로 먼저 성당 문턱을 넘긴 했지만 사실 내가 가장 좋았다. 어린이 미사 때마다 엄마 아빠와 떨어져 앉아야 했던 아이가 매번 미사를 거부하고 들면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지만. 어떻게 해서든 주일미사만은 참례하고 싶었기에 나는 강론이 귀를 스쳐가는 유아방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리거나 혼자 새벽 미사를 다녔다. 그러다 3년 전 주소지에 따라 본당 분리가 이루어졌고, 첫 미사 참례는 하지 못했지만 그 달 말쯤 아이도 나도 자연스레 이곳으로 본당을 옮겨오게 되었다.


작은 규모였지만 매 미사 때마다 세례명을 불러주시고 알은척해주는 신부님이 감사했다. 어린이 미사가 없던 초기에도 아이는 신부님 말씀을 곧이듣고, 집에 오면 그날의 강론을 조잘댔다. 여건 상 견진성사도 받지 못한 내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한참 고민을 하다 감사히 그 뜻을 받은 덕분에 아이는 성당 마당에서 뛰놀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 사이 좋은 언니 오빠들도 많이 생겼고, 이 아이들을 품어주시는 신부님은 늘 따뜻하셨다. 아이의 그림 선물에 귀여운 인형으로 화답해주시고, 지난 크리스마스에는 산타분장을 하고 나타나 기꺼이 온 신자들의 산타가 되어주셨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아이는 저대로 성당 마당에서 신부님, 언니 오빠와 함께 뛰노는 그림 선물(?)과 ‘신부님은 저 마음에 1등이에요.’라는 말을 적은 종이 메달을 준비했다. 나는 부끄럽지만 펜 끝에 마음을 담아 그분의 앞날이 늘 반짝이길 기도한다는 말로 편지를 끝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적었지만 우리에게 정말은 오늘 저녁 미사가 마지막이다.

다른 본당에 계신다고 하면 찾아가기라도 할 테지만, 올 한 해 안식년을 보내시는터라 아마도 뵙기 힘들지 않을까 했더니 아이가 선뜻 손을 잡고 저녁 미사를 드리러 가잔다. 저 부끄럼쟁이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뽀뽀도 해 드리고 “신부님 계신 데 찾아갈게요.”라고 말한다는 데 믿어야겠지?


말보다 글이 익숙한 사람이라 편지 이후에 또 전하지도 못할 이 말은 언제 드릴지 모르겠지만, 더 여문 신앙인이 되어 또 뵙겠습니다.

나린이와 기도 끝에 늘 기억하겠습니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