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XIII

by 오종호

- 전망이 마음에 드나? 정회장?


회장 집무실에 들어선 강회장은 아무 말없이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 보며 영진이 오길 기다려 말했다. 영진은 답 대신 질문했다.


-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뭡니까…, K씨?

- 하하하, 역시 스마트하군요, 정회장. 하지만 질문이 잘못되었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어야 하오.

- 무슨 뜻이오?

- 말 그대로요. 이제 강회장의 제국은 당신 것이 되었으니 말이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만큼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없지 않겠소?


강회장의 모습을 한 K는, 아니 K의 휴머노이드는 영진의 눈을 꿰뚫을 듯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오랫동안 받고 있기 어려웠다.


- 강회장은 어찌되었소?

- 자신의 제국을 위해 지었던 이데리움 어딘가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황제의 무덤 부럽지 않을 테니까. 하하하.

- 당신의 환상을 산 대가치곤 너무 가혹한 것 아니오?

- 후후후, 정회장. 나는 단지 그의 욕망을 거들어 준 것뿐이오. 그 대가로 나는 죽어야 했으니 나의 운명이 더 가혹한 것 아니겠소?

- 궤변이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신이 되었으니까. 다른 모든 미미들에게서는 제거해버린 인간성까지 그대로 갖고 있는 유일신. 당신은 악마요, K.

- 하하하, 그런가요? 당신에게 미미와 함께한 시간을 선사하고 그룹을 통째로 넘긴 사람에게 너무 지나친 표현 아닌가 하오만.


강회장의 얼굴이었지만 영진은 그 안에서 K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K의 얼굴은 조금 일그러졌다.


- 언제부터 강회장 행세를 한 거요?

- 당신의 추측에 맡기겠소.

- 왜 하필 나였소?

- 하하하. 처음으로 질문다운 질문을 했군요, 정회장.

- 배신한 여자에 대한 분노가 미미를 만들게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소? 강회장도 당신의 뜻에 따라주었고. 당신도 당신만의 미미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잖소. 왜 굳이 이데리움을 짓고 나를 끌어들인 거요?

- 하하하하하.


K는 강회장의 웃음으로 폭소했다. 연회의 준비 완료를 알리는 비서의 인터폰 목소리는 K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끊어졌다.


- 나의 미미? 그게 당신 생각의 한계인가, 정영진 회장? 내가 너무 수준을 낮춘 건가.

- …

- 후후후. 그래,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어.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나와 결혼하기 싫다고 하더군.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 나의 특별함이 두렵다더군. 그냥 평범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다시 물었어. 그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고 남들처럼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며 살겠다고 약속했어. 그리고 애원했지, 헤어지지 말자고. 그런데 그녀는 더 이상 이전의 여자가 아니더라고. 그녀는 내가 결코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고 했어. 결혼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런데 그것을 그녀가 어떻게 아냐고, 어? 그녀가 원한다면 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약속을 지킬 수 있었는데 어떻게 아직 살지도 않은 내 인생에 대해 결론을 내려놓고 약속을 깨뜨릴 수가 있냐고, 어?


K의 어투는 바뀌어 있었다. 눈물을 참고 있는 K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두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영진은 전율했다. K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향해 시선을 옮기고 말을 이어갔다.


-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라고 격려했던 여자였어. 그것이 남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라고. 실패는 끝이 아니라 매번 성공에 가까워지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고함을 치듯 이 말을 쏟아 부은 K의 눈동자가 영진의 두 눈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경악하여 시퍼렇게 질린 영진의 얼굴 위로 K의 눈이 다가왔다.


- 어떻게 나를 버리고 너 같은 평범한 인간을 택할 수 있냐고? 사랑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가식적인 인간, 머리 속에 다른 여자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너 같은 인간을 말이야! 미미? 미미라고? 그건 네가 만든 거야. 너의 욕망이 원하는 것을 내가 들어준 것뿐이라고!


영진은 K의 얼굴을 보았다. 강회장의 얼굴이 K로 변하기 시작하는 동안 영진은 결혼식장에서 스친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놀이공원에서도 우연히 어깨를 부딪혔었고, 서울역 화장실에서도 씻은 손을 말리고 있던 그 남자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K는 본래의 제 얼굴로 영진을 보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젠 당신의 시대요, 정회장. 다만 당신은 선택의 권리가 없소. 당신은 영원히 이 일을 하게 될 것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미미이니까. 진짜 당신은 이데리움을 나오지 못했소. 아마 지금쯤 강회장과 당신이 만나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데리움은 곧 영원히 묻혀 버리게 될 거요. 너무 걱정 말아요, 정회장. 당신은 불완전한 미미이니까 말이오. 당신은 영원히 당신으로 살아가는 삶에 적응하게 될 것이니까. 내가 그렇게 당신을 창조했으니까. 당신의 욕망과 적당한 지능이 당신을 살게 할 것이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그만 연회장으로 내려가 보는 것이 좋을 듯 하오. 그럼 건투를 빌겠소.


K는 강회장의 모습으로 집무실을 유유히 걸어 나갔다. 잠시 후 강회장의 비서가 노크 후 들어와 연회장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영진은 비서와 경호원 두 명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면서 게임의 결말에 대해 생각했다. 강회장의 게임이 아니라 K의 게임이었다. K의 완벽한 승리였지만 K도 자신도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 자를 상대로 벌인 게임에서의 승리였다. 그것은 영진의 패배는 아니었다. 존재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의 패배를 수용할 필요가 없었다.


K가 아내에게 갈 것인지, 아내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연회장에서 어떤 말로 데뷔 연설을 시작해야 할지 신경이 쓰였다. 영진은 엘리베이터 안의 금속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 얼굴은 실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의 얼굴이었다. K는 멀리 있지 않을 것이었다. K는 자신의 오만함에 갇힐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한계였다. 영진은 이제부터 K와의 진짜 승부가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곧 인간의 가능성이었다. 자신을 불완전한 미미로 만든 K의 실수는 신의 실수를 닮아 있었다. 완벽한 신은 아직 미래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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