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본사 앞 광장에 이미 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회장이 서게 될 단상 앞에는 검은 롱코트를 입고 짙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낀 이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위압적인 포즈로 도열해 있었다. 그룹사 임원들은 정문의 양 옆부터 단상 앞까지 늘어서서 회장을 기다렸다. 세상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면 그들 개개인은 이미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다. 나이 든 그들을 여전히 누군가의 부하로서 기꺼이 자신의 남은 시간을 소진하게 만드는 힘은 권력일 것이었다. 그들의 권력은 그들이 서 있는 곳에 서 있을 수 있는 권리에서 나오는 것임을 그들은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누군가의 플래시가 터지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흡사 전쟁터에서 사격 명령에 따라 방아쇠가 당겨진 총구들이 내뿜는 소리처럼 들렸다. 회장은 여유 있게 좌우로 시선을 던지면서 느릿느릿 단상을 향해 레드 카펫을 걸어 내려왔다. ‘경영의 유일신’이라 불렸던 사내의 퇴장을 알리는 마지막 무대일 수도 있었기에 사진 기자들의 손가락은 멈출 줄 몰랐다. 신의 입에서 신의 계승자가 선정될 수도 있는 순간임을 아는 방송사 카메라들은 신의 숨소리까지 빠짐없이 전달할 기세로 단상을 향해 렌즈를 들이밀고 있었다. 이윽고 회장이 입을 열었다.
- 쌀쌀한 날 이렇게 야외로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다들 춥지요? 늙은이가 주책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무대 뒤로 사라지는 날에는 꼭 밝은 햇빛 아래이고 싶었습니다. 금방 끝내고 잠시 후 실내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히터 따뜻하게 틀어 놓았으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추운 날 찾아 주신 손님 접대 섭섭하지 않게 준비 잘 했으니 기분 좋게 즐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회장은 단상에 마련된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고 말을 이어갔다.
- 저희 KM그룹은 제 선대 때부터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국민 여러분과 세계 시민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새로운 리더가 이끌어 갈 KM의 위대한 미래에 앞서 제가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그 동안 준비한 작은 선물을 세상에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괴로움만한 것이 없겠지요? 오늘 여러분께 선보일 KM그룹의 신제품은 여러분의 삶에서 헤어짐의 슬픔을 완전히 없애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연인으로 배우자로 친구로 부모로 자식으로, 언제까지나 여러분의 곁에,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채, 사랑하는 사람의 최고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 줄 것입니다. 인간의 오류가 완벽하게 제거된 신성神性 휴머노이드, 신이 창조하고 싶었던 진정한 모습의 인간, 그러나 인간을 뛰어넘은 영원불멸의 생명체!
셔터 소리가 다시 터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포탄이 날라 다니는 듯 섬광이 번쩍였다. 기자들은 물론 기자들 뒤로 어느새 가세한 행인들의 표정도 회장의 예상 밖의 얘기에 잔뜩 흥분하고 있는 중이었다. 달아오르는 좌중의 분위기를 흥미롭다는 듯 조용히 내려다보던 회장이 말을 이어갔다.
- 여러분, 하하하. 미미는 출입이 허가된 기자 분들에게만 연회장에서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샜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탄식과 동시에 안도의 웃음이 뒤범벅되어 터져 나왔다. 오직 한 사람 영진만이 충격에 휩싸인 채 회장에게 꽂혀 있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 대신 여기서는 제 대신 KM그룹의 미래를 이끌어갈 뉴 리더를 여러분께 인사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KM그룹의 새로운 리더 정영진 회장을 소개합니다!
기자들은 처음 듣는 이름에 순간 얼어붙은 듯 침묵했다. 이어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누군지 아느냐고 묻거나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내어 검색하기도 했다. 회장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영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팔을 내밀어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회장의 게임이 끝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 강민 회장, 당신 게임의 결말에 기꺼이 함께해 주리다.
무리에서 벗어나 미소를 띤 채 손짓을 하고 있는 회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파란색 다운 점퍼와 청바지, 그리고 검은 운동화 차림의 젊은 후계자를 향해 탄성과 함께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사방에서 기자들이 영진의 곁으로 달려들어 셔터를 눌러댔다. 영진을 위해 길을 연 경호원들은 기자들을 막아 섰고 기자들은 단상이 잘 보이는 원래 자리로 재빨리 돌아가느라 분주했다.
- 어서 오게, 정회장.
강민 회장의 손은 악수 자세로 바뀌어 있었다. 영진은 그의 손을 잡았다. 강회장은 영진의 손을 한차례 힘주어 잡고 나서 맞잡은 손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플래시 터지는 소리, 셔터 누르는 소리, 탄성 소리, 박수 소리, 휘파람 소리. 소리의 향연이었다. 이데리움 안에서 조각조각 흩어지던 햇살을 닮은 눈부신 소리들이었다.
- 여러분, 정영진 회장입니다. 정식 소개는 안에 들어가서 하지요. 예고한 대로 금방 끝냈죠? 하하. 잠시 후 안에서 뵙겠습니다. 같이 가지.
강회장은 영진의 손을 풀고 등으로 옮겼다. 계산된 포즈였다. 세계의 이목이 쏠린 자리에서 짧고 드라마틱한 신제품 발표와 후계자 소개로 관심을 끈 다음, 그것을 더욱 증폭시킨 채 주도권을 갖고 여유 있게 즐기고 있었다. 영진은 강회장과 나란히 걸었다. 그 길의 끝에 회장의 게임이 준비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뒷모습은 자극적인 자막과 함께 전세계로 급히 타전되고 있었다. 회사 옆 흡연구역에서 마지막 연기를 내뿜고 나오던 영태의 눈앞에도 전광판을 통해서 그 화면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