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by 오종호

아득히 넓은 북쪽의 큰 바다에 살던 곤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물고기는 어느 날 새로 변신한다. 새의 이름은 붕. 붕이 날면 그것의 날개는 마치 구름처럼 하늘을 덮을 정도였다.


붕은 큰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리 하늘 위로 올라 남쪽 바다 천지로 날아간다. 붕의 날갯짓에 바닷물은 3천리 높이로 튄다. 매미와 작은 비둘기는 힘들게 남쪽을 향해 날아가는 붕을 비웃는다. - 소요유(逍遙遊)



사람은 잠재력의 동물이다. 니체의 표현을 빌면 자신을 극복하는 한 인간은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인간에게 시련은 붕의 비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바람일 뿐이다.


곤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붕은 아직 붕이 아니다. 날개가 돋아나지 않은 새는 날 수 없다. 회오리바람을 타는 새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수면 아래에서 파도와 심해의 압력을 견디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창공의 역풍을 거슬러 날 수 있는 몸이 되기 전까지 지느러미는 날개로 바뀌지 않는다. 곤의 몸은 곧 인간 정신의 크기를 상징한다.


물론 바다의 곤으로 사는 것도 한 편의 인생이다. 곤도 아무나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드높은 창공에서 세상을 조망하는 눈을 뜨려는 사람은 지느러미를 거부해야 한다. 바다에서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몸에 익숙해진 물살을 마다하고 회오리바람 속으로 솟구쳐 오를 실력을 길러야 한다.


마침내 지느러미가 날개로 변했다고 해도 붕은 큰 바람을 기다려야 한다. 큰 바람 없이 붕의 몸은 창공으로 도약할 수 없다. 높이 멀리 날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여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큰 바람이 오지 않는 동안 작은 바람 속에서 다리와 날개의 힘을 더욱 단단히 길러 두어야 한다. 난세의 영웅은 그렇게 준비된다. 위대한 정신은 부자유 속에서 대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위대한 정신은 핍박 받는다. 대자유 대신 속박과 지배를 선호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위험하기에. 그들은 가난하고 못 배운 상태에 머물러야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다고 믿기에.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시련이 가혹할수록 탁월한 인간의 정신의 키는 더욱 높아질 뿐이라는 사실을.


인간이 만든 높은 자리는 인간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 자리에 하찮은 자들이 앉는 일은 자주 벌어진다. 그들의 생각대로 위험한 자유보다는 두려운 지배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탓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사람들은 상사와 고객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도록 진화해 왔다. 적당한 구속 안에서 먹고 살 수 있기를, 구속에서 해방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사람들은 희망하며 산다. 인간의 조직 안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힘을 가진 자의 전제정이 행해질 뿐이다.


그러나 일단 자유의 축소를 용인하는 한 그것은 말살될 때까지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저항하는 법을 잊어 버린 닭과 돼지를 겁내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타조와 멧돼지 수준은 되어야 위협을 느낀다. 인간은 타조와 멧돼지처럼 들판과 산을 뛰어다닐 자유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의 자유는 언제나 사냥에 의해 종식될 가능성을 가진 시한부 자유일 따름이다. 충분히 자유롭다고 착각하면서 자유를 잠식 당하는 현실을 모른 체 한다면 결국 자유는 사라지게 된다. 하찮은 자들이 꿈꾸는 독재의 생리상 그것은 진리다. 자유가 사라진 세상에 남은 인간은 그저 사육 당할 뿐이다.


자유는 기꺼이 불행을 감수하고자 할 때 쟁취된다. 인간은 실패 없이 성공할 수 없는 존재다.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진정한 사랑은 달성되지 않는다. 불행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로울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다. 토마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존 새비지는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멋진 신세계'를 위해 맞춤형 인간으로 기획되어 의심과 질문 없이 살아가는 무의미한 삶 대신 질병에 걸릴 권리, 굶주릴 권리, 걱정할 권리, 고통에 시달릴 권리를 부르짖는다. 인간이란 설계된 안락 속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존재다. 위장된 가짜 자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장자는 말한다. 붕의 자유를 꿈꾸라고. 대붕의 대자유를 획득한 사람만이 넌지시 건넬 수 있는 멋진 우언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명리학에 천착한 나는 인생이 얼마나 촘촘하게 설계된 운명적 산물인지 깨달았다. 명리학이 얼마나 체계적인 논리로 구성된 학문인지, 운명의 이치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사유의 세계로 인간을 이끄는지 알게 된 뒤 나는 강의와 상담을 통해 나의 지혜와 통찰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랐고 실천하고 있다.

지구상에 출현한 생명체 중 인간만큼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종은 없다. 해충보다 못한 인간이 있는가 하면 신과 다름 없는 경지에 도달한 인간도 있다. 몇 십만 원의 원금을 빌려 주고 연체했다는 명목으로 수 억 원을 뜯어 내는 악마와 같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고귀한 인간도 있다.


그러나 사주에 담긴 인간의 운명은 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다. 타고난 운명적 범주를 선한 방향으로 향하게 할 때 인간은 한없이 위대해질 가능성을 갖는다. 인간에게 교육과 학습이 필요한 이유이고, 모든 구성원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생활을 영위할 환경을 제공하여 누구도 배움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거나 불의의 사고를 입더라도 인간다운 삶이 흔들리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인공지능을 탄생시킬 정도의 첨단 문명을 일군 이 시대 인류의 목표여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소수 인간의 소유욕과 지배욕은 번번히 절대 다수에 대한 광포한 억압이 자행되는 체제를 만들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체제와 체제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주지하다시피 세상의 모순 앞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민중의 피폐된 삶을 목격한 동양의 여러 선각자들이 나름의 처방을 내놓았다.


그 중에서 나는 노자를 좋아한다. 그가 남긴 <<도덕경>>은 도(道)라고 표현되는 우주 자연의 절대적 진리에 대한 인간 사유의 진수를 보여 주며, 아울러 도에 순응함으로써 함양되는 덕(德)의 개념을 통해 인간 세상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의 핵심을 가르쳐 준다. <<도덕경>> 81장의 짧은 운문적 텍스트는 추상적이면서도 탁월한 체계성을 갖고 있어 논리적 사유 능력을 길러 주고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 노자에게서는 도인의 풍모가 물씬 배어 나온다.


반면에 장자는 우화적 글쓰기에 능통한 철학자다. 비유와 상징이 난무하는 압축적 텍스트들을 남긴 니체와 비교되는 이유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초월적 상상 속에서 빚어진 우화들은 장쾌한 맛이 있다. 진정한 자유에 이른 사람의 드높은 긍지와 웅혼한 기상이 느껴진다.


<담백한 주역>과 <일상의 논어>, 논어 가운데 핵심만을 압축, 정리한 <공자의 조언>과 <담백한 도덕경>, 그리고 <당당하게 살고 싶다면 맹자>에 이어 <어른 장자>의 연재를 시작한다. 장자에게서는 인생의 진리를 유머러스하게 우회하여 들려 주는 어른의 냄새가 난다. 존경 받을 만한 현명한 어른이라면 진지한 철학 얘기라도 멋드러진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해 재미있게 표현할 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장자>>는 우화 성격의 텍스트인 만큼 핵심적인 내용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그것에 담긴 장자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생각해 보는 방식으로 전개하려 한다. 필요할 때만 원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어른 장자>와 함께 좋은 어른이 되는 첫 걸음을 내디뎌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