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Showdown)-9 (final)

오종호 글 · ChatGPT 4o 그림

by 오종호

강회장은 영진의 손을 풀고 등으로 옮겼다. 계산된 포즈였다. 세계의 이목이 쏠린 자리에서 짧고 드라마틱한 신제품 발표와 후계자 소개로 관심을 끈 다음, 그것을 더욱 증폭시킨 채 주도권을 갖고 여유 있게 즐기고 있었다. 영진은 강회장과 나란히 걸었다. 그 길의 끝에 회장의 게임이 준비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뒷모습은 자극적인 자막과 함께 전 세계로 급히 타전되고 있었다. 회사 옆 흡연구역에서 마지막 연기를 내뿜고 나오던 영태의 눈앞에도 전광판을 통해서 그 화면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DALL·E 2024-06-12 10.30.13 - A bustling urban scene in a city with high-rise commercial buildings. On one of the buildings, there is a giant TV screen displaying a close-up of You.png


- 전망이 마음에 드나? 정회장?


회장 집무실에 들어선 강회장은 아무 말없이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며 영진이 오길 기다려 말했다. 영진은 답 대신 질문했다.


-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뭡니까…, K씨?

- 하하하, 역시 스마트하군요, 정회장. 하지만 질문이 잘못되었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어야 하오.

- 무슨 뜻이오?

- 말 그대로요. 이제 강회장의 제국은 당신 것이 되었으니 말이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만큼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없지 않겠소?


강회장의 모습을 한 K는, 아니 K의 안드로이드는 영진의 눈을 꿰뚫을 듯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오랫동안 받고 있기 어려웠다.


DALL·E 2024-06-12 10.40.08 - A dramatic scene where an elderly Chairman Kang-min, in his 80s, dressed in a black suit, and Youngjin, dressed in a white sweater with a winter padde.png


- 강회장은 어찌되었소?

- 자신의 제국을 위해 지었던 이데리움 어딘가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황제의 무덤 부럽지 않을 테니까. 하하하.

- 당신의 환상을 산 대가치곤 너무 가혹한 것 아니오?

- 후후후, 정회장. 나는 단지 그의 욕망을 거들어 준 것뿐이오. 그 대가로 나는 죽어야 했으니 나의 운명이 더 가혹한 것 아니겠소?

- 궤변이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신이 되었으니까. 다른 모든 미미들에게서는 제거해 버린 인간성까지 그대로 갖고 있는 유일신. 당신은 악마요, K.

- 하하하. 그런가요? 당신에게 미미와 함께한 시간을 선사하고 그룹을 통째로 넘긴 사람에게 너무 지나친 표현 아닌가 하오만.


강회장의 얼굴이었지만 영진은 그 안에서 K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K의 얼굴은 조금 일그러졌다.


- 언제부터 강회장 행세를 한 거요?

- 당신의 추측에 맡기겠소.

- 왜 하필 나였소?

- 하하하. 처음으로 질문다운 질문을 했군요, 정회장.

- 배신한 여자에 대한 분노가 미미를 만들게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소? 강회장도 당신의 뜻에 따라 주었고. 당신도 당신만의 미미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잖소. 왜 굳이 이데리움을 짓고 나를 끌어들인 거요?

- 하하하하하.


K는 강회장의 웃음으로 폭소했다. 연회의 준비 완료를 알리는 비서의 인터폰 목소리는 K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끊어졌다.


DALL·E 2024-06-12 10.45.48 - A scene depicting Chairman Kang-min laughing uproariously, reflecting both amusement and a hint of malice. His face shows signs of an old man in his 8.png


- 나의 미미? 그게 당신 생각의 한계인가, 정영진 회장? 내가 너무 수준을 낮춘 건가.

- …

- 후후후. 그래,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어.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나와 결혼하기 싫다고 하더군.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 나의 특별함이 두렵다더군. 그냥 평범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다시 물었어. 그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고 남들처럼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며 살겠다고 약속했어. 그리고 애원했지, 헤어지지 말자고. 그런데 그녀는 더 이상 이전의 여자가 아니더라고. 그녀는 내가 결코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고 했어. 결혼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런데 그것을 그녀가 어떻게 아냐고, 어? 그녀가 원한다면 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약속을 지킬 수 있었는데 어떻게 아직 살지도 않은 내 인생에 대해 결론을 내려놓고 약속을 깨뜨릴 수가 있냐고, 어? 어? 어!


K의 어투는 바뀌어 있었다. 눈물을 참고 있는 K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두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영진은 전율했다. K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향해 시선을 옮기고 말을 이어갔다.


DALL·E 2024-06-12 10.49.47 - A scene depicting Chairman Kang-min in a fit of rage, passionately speaking with intense emotion. He is an elderly man in his 80s, dressed in a black .png


-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라고 격려했던 여자였어. 그것이 남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라고. 실패는 끝이 아니라 매번 성공에 가까워지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고함을 치듯 이 말을 쏟아 부은 K의 눈동자가 영진의 두 눈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경악하여 시퍼렇게 질린 영진의 얼굴 위로 K의 눈이 다가왔다.


- 어떻게 나를 버리고 너 같은 평범한 인간을 택할 수 있냐고. 사랑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가식적인 인간, 머리 속에 다른 여자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너 같은 인간을 말이야! 미미? 미미라고? 그건 네가 만든 거야. 너의 욕망이 원하는 것을 내가 들어준 것뿐이라고!


DALL·E 2024-06-12 10.54.41 - A scene depicting Youngjin looking horrified and terrified. He is in his mid-30s, with a face showing signs of maturity. He is wearing a black padded .png


영진은 K의 얼굴을 보았다. 강회장의 얼굴이 K로 변하기 시작하는 동안 영진은 결혼식장에서 스친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놀이공원에서도 우연히 어깨를 부딪혔었고, 서울역 화장실에서도 씻은 손을 말리고 있던 그 남자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K는 본래의 제 얼굴로 영진을 보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젠 당신의 시대요, 정회장. 다만 당신은 선택의 권리가 없소. 당신은 영원히 이 일을 하게 될 것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미미이니까. 진짜 당신은 이데리움을 나오지 못했소. 아마 지금쯤 강회장과 당신이 만나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데리움은 곧 영원히 묻혀 버리게 될 거요. 너무 걱정 말아요, 정회장. 당신은 불완전한 미미이니까 말이오. 당신은 영원히 당신으로 살아가는 삶에 적응하게 될 것이니까. 내가 그렇게 당신을 창조했으니까. 당신의 욕망과 적당한 지능이 당신을 살게 할 것이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그만 연회장으로 내려가 보는 것이 좋을 듯 하오. 그럼 건투를 빌겠소.


DALL·E 2024-06-12 11.02.00 - A dramatic scene where Youngjin, dressed in a white sweater with a winter padded jacket, is facing a young version of Chairman Kang-min in his mid-30s.png


K는 강회장의 모습으로 집무실을 유유히 걸어 나갔다. 잠시 후 강회장의 비서가 노크 후 들어와 수트를 소파에 걸쳐 놓았다. 갈아입고 나오면 연회장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영진은 비서와 경호원 두 명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면서 게임의 결말에 대해 생각했다. 강회장의 게임이 아니라 K의 게임이었다. K의 완벽한 승리였지만 K도 자신도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 자를 상대로 벌인 게임에서의 승리였다. 그것은 영진의 패배는 아니었다. 존재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의 패배를 수용할 필요가 없었다.


K가 아내에게 갈 것인지, 아내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연회장에서 어떤 말로 데뷔 연설을 시작해야 할지 신경이 쓰였다. 영진은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 얼굴은 실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의 얼굴이었다. K는 멀리 있지 않을 것이었다. K는 자신의 오만함에 갇힐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한계였다. 영진은 이제부터 K와의 진짜 승부가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곧 인간의 가능성이었다. 자신을 불완전한 미미로 만든 K의 실수는 신의 실수를 닮아 있었다. 완벽한 신은 아직 미래형이었다.


DALL·E 2024-06-12 11.10.00 - A scene inside a sleek, gold-colored elevator with the doors closed. Youngjin, dressed in a sophisticated black suit, is looking confidently at his ow.png


에필로그


집무실을 나가면서 K는 비서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제 자신은 세상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출 것이었다. 강회장은 유언장을 남긴 채 그 어느 곳에서도 종적을 찾을 수 없이 사라진 신비의 인물로 기억될 것이었다. 삶의 끝에서 강회장은 분노와 패배감으로 눈을 감을 것이었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그가 역사에 남는 방식에 대해서는 만족할 것이었다.


인간에게는 죽음의 시작이라는 것이 없었다. 죽음은 삶과 공존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늘 잔인했다. 삶에서 부질없는 쾌락을 누리기 위해 잔인했고, 유한한 생에 공허한 이름을 남기기 위해 잔인했다. 인간 문명의 99.9%는 잔인함의 산물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많은 인간은 흔쾌히 벌레가 되었다. 때로는 벌레로라도 삶을 연명하기 위하여 기꺼이 타인의 삶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결한 인간들은 벌레보다 못한 인간들에 의해 벌레처럼 죽임을 당했다. 인간에게 자신의 삶과 공존할 수 있는 죽음은 남의 죽음뿐이었다.


신의 지위에 올라 바라보는 인간은 하찮은 존재였다. 인간은 수명의 한계만큼 태생적으로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인간의 역사는 파괴의 역사였다. 인간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진보의 과정이라고 얘기했지만 인간이 말하는 진보의 궁극은 결국 미미였다. K가 보기엔 그것은 고결한 인간들의 위대한 깨달음이어야 했다. 인간은 사실상 모든 것을 깨달았지만 인간의 깨달음은 계승되지 않았다. 인간의 역사는 매번 유아기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미미를 만나는 순간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서로를 파멸시켜 온 보람을 느낄지도 몰랐다. 결국 자신들이 해냈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감격해 할 것이었다. 그러나 K는 인간이 곧 미미를 싱거워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신을 향해 끊임없이 엎드리면서도 정작 신을 닮은 인간을 늘 탄압해 왔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진보의 궁극적 산물인 미미를 역사의 원점으로의 회귀를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였다. 그 한계는 오직 모든 인간이 궤멸된 후에 극복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K는 영진의 손에서 인간의 역사가 파괴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영진은 미미를 인간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꿔 갈 것임에 분명했다. 그것은 미미의 등장에 환호할 인간들이나 저항할 인간들과는 달리 그의 권력의 유지와 직결된 정치적 인간들이 머지않아 원할 방식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K는 이데리움1에서 영원히 잠든 강회장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데리움2에서 충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었지만 신에게 시간은 언제나 찰나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K는 자신의 창조물이 창조할 수 있는 극한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인간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미미들의 신이 된 영진에게 진짜 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완벽한 패배감 앞에서 무력해진 영진과 미미들과 인간들의 절망을 차례로 확인하고 싶었다. K는 인간의 역사가 기다려 온 최후의 신으로서 그들의 앞에 서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흔적 없이 사라진 뒤일 것이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K는 기꺼이 영원히 잠드는 길을 택했을 것이었다. 사랑하는 인간의 삶만이 죽음 앞에서 안식을 맞을 수 있음을 신이 된 K는 깨닫고 있었다. K는 사랑에 빠진 인간들의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여전히 지독한 괴로움에 빠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마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창조한 신으로서의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괴감을 이겨낼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