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명리를 연재하는 이유II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한가운데서 저는 직감했습니다. 훗날 AI가 인류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아마도 터미네이터가 아니라 바이러스를 수단으로 활용하게 될 것임을 말입니다. AI 입장에서 바라보니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을 보호하면서 인류만을 특정하여 제거하는데 바이러스만큼 효율적인 무기가 없다는 것이 자명해 보였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간주하며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풍경은 인류의 연대가 얼마나 손쉽게 해체될 수 있는지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에이전트 스미스의 대사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지구상에 같은 패턴을 따르는 또 하나의 유기체가 있지… 바이러스 말이야. 인류는 질병이야, 이 행성의 암적 존재이지. 너희들은 역병이야, 그리고 우리는… 치료제다(…There is another organism on this planet that follows the same pattern... a virus. Human beings are a disease, a cancer on this planet, you are a plague, and we... are the cure). 인류가 지구를 지배해 온 방식과 현재의 지구를 소모하는 방식을 이 대사는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지구가 영구히 현재의 모습으로 지속될 것처럼 인류는 자원을 소모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기술을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 스스로의 소외를 가속화합니다. 선의의 외피를 두른 인간들 간의 경쟁은 인류 전체의 평화로운 공존 대신 어리석은 공멸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스페이스 엑스, 블루 오리진과 같은 민간 우주 기업들이 미래 인류의 터전을 지구 밖에서 구상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인류의 자성自省을 통한 지구 환경의 극적인 변화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적이 끊긴 도심의 황량한 모습은 분명 낯설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예시하는 전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구가 시뮬레이션 우주 속 가상 세계이고 우리가 프로그램 된 캐릭터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들과 달리 우리는 이 세계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좋든 싫든 이 세계에서 지워지기 전까지 우리는 이 세계 안에서 개인으로서의 삶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동시에 직면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번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들고 짙은 안개 속에 갇혀 보이지 않는 길 앞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대형 사고로 숨진 사람들은 그날 모두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인가요?” 잔인하지만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주를 보면 아마도 그때 그런 물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설계된 인간으로서의 운명이니까요. 하지만 공동체가 제 역할을 했다면 그들은 모두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설계된 운명의 여백이니까요.” 명리학을 소명으로 받아들인 이후 제가 수립한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명리학을 가장 쉽고 재미 있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만 상담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기를 쳐서라도 돈을 벌려는 사람, 이미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 등 타인과 공동체는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자기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지혜도 건네주지 않겠다는 것이 두 번째 목표의 의미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명리학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약자들을 위해 기능할 때 명리학은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갖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가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공동체를 마침내 갖게 되었을 때 명리학으로 이 세상과 인간에게 작은 기여를 하고 떠날 수 있음에 감사하길 희망합니다. 명리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아름다운 공동체, 그것이 제가 만나고 싶은 미래의 우리 사회 모습입니다.
지금의 삶이 힘들다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절망스럽다면, 명리학 공부를 통해 그 이유를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꿈꾸고 있는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갈망이 단지 경제적 자유에 대한 욕망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행복’을 위한 길은 무엇인지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무시하고 나를 비난하고 나를 배신하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나의 모자람을 수용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인정해주며 내가 힘들 때 그저 나를 안아주는 사람과 함께라면 찰나와 같은 덧없는 인생도 살만한 것이 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간의 많은 지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은 명리학 공부가 선사하는 보너스이기도 합니다.
명리학 공부를 통해 인생 바다에서의 표류를 항해로 전환하십시오. 험난한 파도를 만날지라도 그것과 맞서 싸워 극복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삶은, 작은 기교로는 극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남들이 이해해주지 못할지라도, 때로는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지라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스스로에게 선물해 주십시오. 운명이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여 설계된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위치를 인정하게 되면 지금보다 겸손한 자세로 ‘나’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동체를 생각하는 따뜻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자유의지의 영역을 발견하여 설계된 운명의 범주를 구성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음껏 변주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삶을 선택하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무 때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자유의지를 발휘할 때가 삶의 혁명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운명은 여백을 만들어 그곳에 인간이 개입하기를 환영합니다. 타인의 시선 따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인은 언제나 나보다는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 법입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수립하고 방법을 깨달아 밀고나가시기 바랍니다.
명리학은 인문학입니다. 보편적 진리는 있지만 결국 자기만의 명리학을 하는 것입니다. 명리학 공부의 단계를 비유하자면 공부 과정은 다윈의 ‘미소 변이의 점진적 축적’과 같습니다.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 것 같고 갈 길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재미에 푹 빠져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보이지 않던 수면 아래의 작은 변이들이 누적되어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로 폭발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사주 해석 능력에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찰나는 ‘창조적 각성’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나 만의 명리학이 시작되는 결정적 순간이 그때입니다. 변화를 통찰하는 통변洞變도, 통변通辯이라는 이름의 상담도, 명리학을 전수하는 강의도 그때부터는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차근차근 그 길을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시기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멋진 삶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갈망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명리학이 그 갈망을 현실화하는데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자기반성을 위해서는 생각과 언어라는 도구가 필요하듯 시간과 공간은 자기인식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 알렉산더 데만트, 『시간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