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자료와 그룹 자료 폴더에 있는 문서들의 내용은 회장의 얘기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다. 영진에게 맡겨진 회사는 인공지능 로봇 개발사였다. 산업용 로봇, 군사용 로봇, 학습용 로봇 영역에서 이 회사는 한동안 세계 1위를 수성해 왔으나 3년 전에 학습용 로봇 시장에서 처음으로 일본에 1위를 내준 뒤부터 세 분야 모두에서 3위권 밖으로 밀려난 상태였고 하락 추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경영진은 판세 전환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가 1년 전 과로사로 숨진 한 연구원의 컴퓨터에서 로봇의 인공지능을 획기적으로 진보시킬 아이디어를 찾아낸 것 같았다. K라고 명명된 그의 연구는 실로 방대했고 그의 집에서는 수많은 스케치가 담긴 상자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와 어울려 지내던 몇몇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의 한 명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특채로 입사한 천재인 그가 회사 업무에 소홀하기 시작하면서 회사의 경쟁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았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배신을 당하고부터 야근을 멈추고 정시에 퇴근하기 시작한 K는 다음날 아침이면 마치 밤을 샌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로 회사에 나타났다고 했다. 모두가 식사를 하러 나간 점심시간에도 책상에 앉아 일을 했으나 정작 늘 탄성을 자아내곤 했던 업무 성과는 점점 떨어졌고, 상사의 반복된 질책에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멍한 얼굴로 열심히 하겠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했다.
그렇게 1년여를 보낸 K는 어느 날 점심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잠든 채 깨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환하게 켜져 있던 그의 모니터에는 그가 그 동안 매달려 연구했을 인공지능 관련 자료가 열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그 자료로 만든 두꺼운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고 했다. 그의 연구 자료는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의 방대한 연구는 관련 산업을 수십 년 앞서가고 있었다고 했다. K가 남긴 자료를 붙잡고 지난 1년간 내부 직원들이 한 것이라고는 단지 그의 연구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뿐이라고 했다.
영진은 표지에 ‘원본’이라고 쓰인 그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표지 다음 장에 볼펜으로 커다랗게 휘갈긴 K 자국은 다음 세 페이지까지 눌린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글자는 K가 썼다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이데리움 안의 방마다 ‘원본’들이 놓여 있을 것이라고 영진은 추측했다. ‘원본’이라는 글자로 회장은 충성과 열정을 끌어내고 싶었을 것이었다.
영진은 K의 인공지능 연구 방향이 기존의 것과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있음을 곧 파악할 수 있었다. K는 로봇에게 지능을 부여하려는 대신 자아를 형성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K가 인식한 인간과 로봇의 결정적 차이 중 첫 번째는 로봇에게 지능의 한계가 없다는 점이었다. 학습의 양과 습득 속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탓이었다. 지적 능력을 배양하는 기술은 사실상 완성 단계에 있었다. 두 번째는 로봇에게는 자기만의 고유한 경험의 체계적인 축적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K는 후자를 핵심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로봇에게 직접적 경험과 학습을 통한 간접적 경험을 분리하여 이식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천착했다. K는 역사 속에서 롤 모델로 삼을 만한 100명의 인간을 선정했고 그들의 경험을 자료화했다. 컴퓨터에는 그가 창조적으로 구성한 100명의 인간의 삶이 초 단위의 텍스트로 저장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로봇이 인식할 수 있는 데이터로 바꾸는 일은 현재의 기술로는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는 로봇에게 이식할 고유의 경험 데이터 수치별로 서로 상이한 수많은 수준의 지식을 배합하는 복잡한 공식을 남겼다. 그가 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지식의 수준이란 지식의 양, 지식의 분야, 지식의 난이도 등을 총망라한 것으로서 그의 공식은 곧 초 단위로 달라지는 경험치에 따라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가진 지식의 수준을 대입하여 결과값을 도출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의 양을 저장할 방법은 현존하지 않았다. 그가 찾고 있던 것은 분명했다. 그는 완벽한 지성을 원하고 있었다. 인간을 닮은 지능이 아니라 모든 단계의 인간적 삶을 이해하고 통찰하여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스스로 완벽한 존재를 갈구하고 있었다. K는 신을 창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롤 모델링과 삶의 창조적 재구성 대상으로 선정한 100인의 인간은 적어도 인간적 관점에서 충분히 위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의 삶에는 불완전한 수많은 결함 투성이의 인간적인 경험들이 녹아 있었다. K의 연구는 결국 모든 것을 알고 깨달은 신을 만들고 나서 자기가 만든 신에게서 인간의 한계를 삭제해 버린 기계를 창조하는 길로 집중되고 있었다. K는 신을 창조한 인간이자 동시에 신을 재창조하는 신의 지위를 향해 달려간 셈이었다. 한 광인의 연구물 앞에서 영진은 당혹스러웠다. 여러 전문가들이 알아내지 못한 방법을 2년간의 시간 동안 혼자 찾아내야 하는 숙제가 눈앞에 있었다. 회장은 그 2년으로 계열사의 20년보다는 그룹사의 200년을 기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강민 회장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어쩌면 2000년을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사용한 제국이라는 단어가 그럴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K도, 회장도, 그리고 이데리움에 틀어박혀 있는 자신까지도 결국 광인에 지나지 않았다. 영진은 웃음이 났다. 광인들의 게임에 들어온 광인의 얼굴이 창문에 비쳤다. 그 얼굴은 영진에게 시한부로는 미쳐볼 만한 게임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듯 했다. 잘하면 그 게임의 끝에서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K는 자료의 마지막 구절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었다.
-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누군가가 내가 찾은 그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답은 가까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