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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잉고잉 박리라 Mar 26. 2024

이중적인 내 마음

어느 햇살 좋던 가을날 엄마가 쓰러져 머리를 여는 아주 큰 수술을 두 번씩이나 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때, 나는 그때까지도 엄마와의 희망적인 미래를 꿈꿨다.


‘그 큰 수술도 이겨낸 엄마인 걸. 그래, 지금은 엄마가 이렇게 기저귀를 차고 아기처럼 누워 있지만 언젠가 다시 걸을 수 있을 거야. 그럼 엄마와 함께 여행도 갈 수 있겠지. 예전과 같은 평범한 일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열심히 재활만 받으면 말이야’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금쪽같은 세 아이도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가사휴직을 낸 뒤 엄마가 있는 재활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엄마의 재활에 온 마음을 다해 매달렸다. 그때는 내가 잘만 하면 엄마가 빨리 나을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첫 한 두 달은 재활을 통해 마비가 점차 좋아지고 인지도 점점 돌아왔으나 그 뒤 끊임없이 폐렴과 호흡곤란, 탈수 같은 내과적 이벤트가 발생해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한 두 달을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대학병원들을 전전,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낮과 밤을 보내자 나 역시 점차 지쳐 가기 시작했다. 너무도 쉬고 싶고 자고 싶었던 그 무렵, 쪽잠에 트랜스퍼로 허리며 어깨, 팔, 손목 등 아프지 않은 부위가 없을 무렵, 무엇보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미치기 직전일 무렵, 그래서 나의 이 사나운 운명이과 팔자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던 그 무렵 또 한 번의 사건이 터졌다.


새벽 3시. 엄마의 숨소리가 이상해 병실 불을 켰던 그 시간. 나는 그날 엄마의 풀린 눈과 가늘게 떨리는 손을 마주했다. 너무 이상했다. 반사적으로 긴급호출 버튼을 눌러 간호사를 부르고 엄마의 산소포화도를 측정했다. 수치는 30~40대. 일반 성인의 산소포화도가 98~99, 병원에 있는 환자들의 경우 90 아래로만 내려가도 산소줄을 다는데, 저런 낮은 수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임종 때나 나타날 법한 수치.


그렇게 엄마는 산소를 달고 또다시 구급차를 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슬아슬해 보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를 위해서인지 나를 위해서인지 모를,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를 중얼거리며 이 세상 모든 신에게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라고. ‘다른 거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게요. 그저 살려만 주세요’라고.


그리고 엄마는 또다시 살았다. 기적적으로.


그리고 그 이상했던 새벽날로부터 이제 다시 1년이 지났다. 그때 뇌파가 나오지 않는 그러니까 식물인간이라고 했던 엄마는,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가, 조금씩 왼쪽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에서, 이제는 왼손과 왼다리를 움직이고 힘들지만 오른손으로 글씨도 조금 쓸 수 있는 또렷한 의식의 사지마비 환자로 거듭났다.


그 더디고 힘겨웠던 시간을 견디며 누구는 기적이라 말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종종 ‘이제 그만 엄마가 저 갑갑한 몸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자립적으로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삶. 말을 할 수도, 맛을 볼 수도, 화장실을 갈 수도 없는 삶. 숨이 붙어사는 삶이 불행인 듯, 보고 싶은 사람이 있냐는 말에 세차게 도리질을 하는 엄마를 보면 속이 정말 미어진다. 게다가 집 한 채를 판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천만 원 아래로 떨어져 있는 통장 잔고를 보며 날짜를 가늠해 보는 내가 너무 속물 같아서 그것도 참 화가 난다.


그때, 두 번째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중환자실에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료진의 말에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해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이제 그만 엄마를 보내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아빠를 원망했다. 매일 중환자실 면회시간마다 엄마를 붙잡고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아직 엄마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엄마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아무리 다짐을 하고 가도 엄마만 보면 눈물이 났고, 한 번 시작된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에밀 아자르의 작품, <자기 앞에 생>의 주인공 모모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었던 셈이니까"라고. 그리고 나 역시 가끔 퇴근길 차 안에서 눈물을 삼키며,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때 저승으로 가려던 엄마는 나 때문에 그곳으로 가지 못했던 건 아닐까… 지난 일 년의 시간이 엄마에겐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고통의 시간이었던 건 아닐까’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엄마의 컨디션이 나빠지면 두려워진다. 무서워진다.  


그래서 결론은 이 이중적인 마음이 엄마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것. 엄마가 빨리 하늘나라로 가길 바라서 그러면서도 또 엄마가 더 오래 내 결에 머물길 바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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