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품격

by Henry
(25-11-18) 고독의 품격.jpg


서재의 밤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M은 서재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 웃음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웃는다. 아쉬울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다.


M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외로움과 고독이 밀려온다. 고독과 만나면 M은 조용히 침잠하며 명상으로 자신을 가라앉힌다. 하지만 외로움이 올 때면, M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길게 내쉰다.


M은 서재로 들어가 브람스의 헝가리안 무곡을 튼다. 1번의 애수, 4번의 비애, 5번의 집시 선율이 방안을 서서히 적셔온다. M은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는다. 이어지는 곡 하나하나가 건반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가슴을 두드린다. 피아노의 울림이 깊어질수록 M의 가슴은 더 먹먹해진다.


M은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중년 남성에게 찾아오는 가벼운 회한도, 한때 스쳐 지나가는 우울도 아니다. 평생 M을 따라다니며 마음 어딘가에 그림자를 드리워온, 마치 피할 수 없는 천형(天刑) 같은 슬픔이었다.


M은 순간을 즐기고 일상에 만족하며 사람들이 참 부럽다. 브람스를 끝까지 듣지 않아도, 실존의 의미를 묻지 않아도, 그들은 고독하지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M에게는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그러나 문득 생각한다. 그들이라고 왜 고독하지 않을까? 그들이라고 왜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하지만 M의 그것은 달랐다. M의 고독과 외로움에는 시작이 없었다. 태어난 어느 순간부터 이미 그 어둠은 M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심연으로 들어가면

얕은 물에서 노는 아이들은 즐겁다. 햇살이 물 밑바닥까지 닿고, 발이 땅에 닿는다. 안전하고 편안하다. 두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깊은 바다로 들어간 사람은 다르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햇살이 닿지 않는 어둠이 있다. 무엇이 아래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두렵고 외롭다.


그러나 깊은 바닥을 밟아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 있다. 수면 아래의 고요함. 빛이 물속에서 만드는 신비로운 무늬. 압력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지금 살아있다는 절박한 감각. M의 외로움은 깊은 바다의 외로움을 닮았다.


브람스를 듣고, 하이데거를 읽고, 그해 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봄까지 떠올리며 M이 느끼는 고독은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M이 도달한 내면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니체는 말했다. “고독한 사람이여,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수상록》에서 이렇게 썼다. '일상인은 사교를 갈망하지만, 뛰어난 정신은 고독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


그렇다고 M은 위대한 철학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오히려 그런 인용이 자신의 고독을 미화하거나 깊이를 과장하는 변명처럼 들릴까 경계한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자신을 깊이 탐구하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 번 자신의 내면 깊숙이 내려간 사람은, 다시 얕은 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의 거리

M에게는 친구가 있다. 가족도 있다. 동료도 있다. 그런데 왜 외로운가? 문제는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생각의 거리다. M이 브람스 헝가리안 무곡을 들으며 느끼는 것 - 시간의 흐름, 덧없음, 아름다움 속에 스며든 슬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 - 을 오롯이 혼자 느껴야 한다. 그런 M은 그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다.


정신분석학자 융(Jung)은 '페르소나(Persona)'와 '그림자(Shadow)'를 구분했다. 페르소나는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가면이다. 그림자는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면의 진실이다. 대부분 사람은 페르소나 수준에서 관계를 맺는다. 직장 동료, 동창, 이웃과의 관계는 대체로 그렇다. 서로의 가면을 보며 적당히 어울린다. 불편하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그런데 M은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그해 가을의 비겁함,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도망쳤던 순간, 평생 안고 살아온 결핍을 직면한다. 이런 깊이까지 내려간 사람은, 페르소나의 대화로는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이 자기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사람의 딜레마다. 내면의 심연으로 들어갈수록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든다.

외로움, 살아있음의 증거

M은 생각을 바꾸기로 한다. '나는 외롭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쉽게 살지 못하는가?' 이것을 이렇게 바꾼다. '나는 외롭다. 그것은 내가 깊이 살고 있다는 증거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평생 고독했다. 약혼녀 레기네와의 결별, 사회적 조롱, 그리고 외로운 죽음. 그러나 그는 이 고독을 비극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개념을 통해, 고독이야말로 진정한 실존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이라고 보았다.

M도 깨닫는다. 내가 브람스를 들으며 눈물 흘리는 것, 삶의 의미를 묻는 것, 그해 가을로 자꾸 돌아가는 것, 이 모든 것이 고독과 외로움을 만든다. 그런데 이것들을 포기하면 자신은 더 이상 M이 아니다.

외로움은 M이 M으로 존재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다. 하이데거는 "본래적 실존"을 말했다. 대중 속에 묻혀 '그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서는 것. 하이데거에 따르면, 본래적으로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고독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중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독의 품격

브람스의 음악이 계속 울린다. 이제 5번이 끝나고 6번과 7번으로 이어진다. 피아노 건반이 더빨라지고 마치 집시의 춤처럼 격렬하다. 지금, 이 음악 속에서 M은 온전히 M이다. 그는 여전히 외롭지만 온전하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에서 “어떤 고독에는 품격이 있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고독을 미화하지 않았다. 도피와 두려움, 증오에서 비롯된 고독은 오히려 인간을 갉아먹는다고 보았다. 품격 있는 고독은 자기 회피가 아니라, 자기 인식에서 비롯될 때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사람의 고독은 그것과 다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조건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간이다. M의 고독에도 품격이 있을까? M이 내면의 진실을 알기 위해 치열하고 살고 있는가? 어쩌면 해답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브람스의 헝가리안 무곡이 모두 끝났다. 그 사이 창밖에는 겨울 어둠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몇몇 집의 불빛이 보인다. 저 집들 안에도 누군가 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도 지금 혼자 음악을 듣고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도 외롭고 고독할지 모른다.


갑자기 M은 미소 짓는다. 우리는 각자 집에서, 다른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외롭고 고독하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서로를 연결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고독과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동반자다. 그 고독과 외로움에 품격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2025년 11월 말,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간 지금, M은 여전히 외롭고 고독하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M이 깊이, 또 치열하게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분다. 어둠 속에서 나뭇잎이 흔들린다. 세상은 고요하다. 그리고 M도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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