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먼저다.
사람들은 주어진 여건 안에서 살아간다. 직장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하루를 견디고 채우며 살아간다. 그것이 그들의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 즉 실존이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가족의 안정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것 또한 그들의 실존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사는가? 타인도, 가족도 아닌, '내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즉답할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질문은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 곧 ‘본질’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하루를 살아내는 실존의 문제에 바쁘다. 그래서 왜 사느냐는 본질보다 어떻게 사느냐는 실존의 문제가 앞선다.
M도 대부분의 사람처럼 본질보다 실존이 앞선 삶을 살아왔다. 그저 하루를 살아내는 데에 바빴고,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쪽을 택해왔다. 그러나 친한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마주한 순간, 묻어두었던 그해 가을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그때부터 질문이 시작된다.
왜 그는 그해 가을로 끝없이 돌아가는가? 왜 그 시절을 떠나보내지 못하는가? 왜 그 거리의 공기와 음악과 빛, 그리고 바람의 감각까지 마음속에 붙잡고 되풀이해 호출하는가?
질문의 답은 명확했다. 그해 가을은 M이 실존의 불안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처음 마주한 계절이었다. 단지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습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본질인가’라는 물음이 처음 마음에 깃든 순간이었다. 그 후로 M의 삶은 그저 살아가는 실존에서 벗어나, 본질을 찾아가는 긴 여행으로 변해갔다.
그해 가을은 M의 삶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 균열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무너진 채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무너짐 속에서 질문이 자랐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실존과 본질 사이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말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본질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신이 설계한 피조물도, 자연이 미리 규정해 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먼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실존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실존 속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삶의 본질을 하나씩 만들어간다.
의자를 떠올려 보라. 목수는 의자를 만들기 전에 이미 의자의 본질을 알고 있다. ‘사람이 앉기 위한 것.’ 그것이 의자의 본질이다. 그렇게 규정된 본질에 따라 의자는 만들어진다. 그 후 의자는 어딘가에 놓이고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이 경우 의자의 본질은 실존보다 앞선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본질은 애초에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먼저 태어나고, 그다음 살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의 본모습을—다시 말해 본질을—규정해 간다. 인간에게는 실존이 먼저 있고, 그 실존이 본질을 만들어 간다.
그해 가을, M은 그곳에 던져졌다. 그해 가을 M은 비겁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쳤다. 그 순간 M에게는 선택지가 있었다. 용기를 내어 고백할 수도, 쟁취하려 애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M은 결국 도망쳤다. 그것은 M이 선택한 실존적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순간 M은 자신의 본질 일부를 만들었다. '용기 없는 자', '결정적 순간에 도망치는 자'. 그 말은 저주처럼 M의 내면 깊숙이 새겨졌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M은 그 순간을 되돌아보았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두려웠을까? 그때 다르게 행동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끊임없는 회상, 이 집요한 자기 성찰이 M의 새로운 실존이 되었다.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고, 그 시절의 자신을 다독이는 행위. 이것이 지금 M의 삶을 규정하는 본질이다.
선택할 자유와 선택하지 않을 자유
M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인간이 자유롭다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삶은 처음부터 선택의 무대가 아니었다.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던져져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를 '피투성(被投性)'이라 불렀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태어난 환경, 시대, 가족, 언어. 이것들은 우리가 고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태어남도, 성장 과정도, 결핍도, 상실도 — 그 어떤 것도 M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M에게 남겨진 자유란,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그 작은 틈뿐이었다.
그해 가을도, 그 가을의 만남도 M의 자유로운 선택만은 아니었다. M은 그 상황 속에 던져졌다. 그 상황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상실 또한 예고 없이 찾아갔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쉘부르의 우산’과 ‘어느 아름다운 여름 아침’을 들었던 것. 갑작스레 쏟아진 비를 맞으며 걸었던 것. 가을비의 쓸쓸함을 기억하기로 한 것은 M의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브람스의 ‘헝가리안 무곡 5번’이 흐르던 작은 카페 2층. 그곳에서의 만남과 결별, 그리고 그 순간을 놓지 않기로 한 것. 이 모든 것이 M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 가을은 운명처럼 던져졌지만, 그 가을을 어떤 의미로 기억할지는 언제나 M의 선택이었다.
인간은 무한한 자유의 주체가 아니라 언젠가 생명이 다하는 유한한 존재다. 그리고 이 유한성을 직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 어쩌면 M이 기억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삶의 유한성을 실감했다. M은 비로소 삶의 실존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고 말하며 “자유롭게 선택하라”라고 촉구한다. 반면 하이데거는 “죽음과 시간 앞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라”라고 말한다.
선택하는 것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M이 그해 가을 도망친 것도 선택이었고, 지금 그것을 끝없이 되돌아보는 것도 선택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응시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M의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해 가을 이전, 더 깊은 시간의 층위가 기다리고 있다. '어느 아름다운 여름 아침'의 휘파람 소리, 친구의 방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던 가을 햇살,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된 브람스의 '헝가리안 무곡 5번'. M은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그 최초의 던져짐, 가장 오래된 나이테, 모든 업의 씨앗이 뿌려진 곳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