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없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함께 살았던 시간 속에 있었다고 해도, 지금의 '그 사람'과 그때의 '그 사람'은 다른 존재다. M이 보낸 세월 속에 그 사람도, 그 시절도 흘러가 버렸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시간도 그렇게 흐른다. 시간은 사람을 바꾸고, 풍경을 바꾼다.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며, 되돌릴 수 없다. 그때의 하늘, 그때의 공기, 그때의 숨결은 지금의 시간 속에는 없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은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현재 속에 보존된다고 했다. 과거는 현재 속에 층층이 쌓여 있다. 나이테처럼 그리고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과거가 현재를 만든다. 기억은 사라지기 쉽다. 그러나 그때의 공기와 마음의 결은 우리 안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M이 붙잡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을 품고 있던 세계, 그때의 바람과 햇살, 그리고 영원하다고 믿었던 마음의 온도다. M이 그리워하는 것은 결국, 그 시절의 ‘M’이다.
이야기가 멈추는 순간, 사랑은 영원해진다.
오래전에 상영된〈러브 스토리〉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 제니는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고 말한다.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M은 그것이 사랑의 완성형이라고 믿었다. 시간을 초월한 완전한 사랑은 서로를 온전히 감싸는 일이라고. 사랑한다는 것은 용서를 구할 필요조차 없는 완전한 이해와 수용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M은 알았다. 이 대사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진실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능했던 짧은 순간 때문이라는 것을. 여주인공 제니는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은 그 순간에서 멈춰버렸고, 멈춘 순간의 사랑은 영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진실한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이 영원을 얻는 순간은 따로 있다. 사랑이 완성된 채 끝나버렸을 때, 연인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중단되었을 때, 혹은 연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소식을 더는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사랑은 시간의 바깥으로 올라간다. 변하지 않는 불멸의 빛으로 남는다.
영화 속 여주인공 제니가 살아 있다면, 그들의 사랑은 시간 속을 흘러갔을 것이다. 내일로, 모레로, 수많은 아침과 저녁의 무게 속에서 사랑은 시험받는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는 순간, 그들의 사랑은 시간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의 사랑은 "미안해"라는 말이 필요 없는 그 순간에 머문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변했을까?
우리가 신화처럼 기억하는〈로미오와 줄리엣〉은 어떨까? 그들이 살아남았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베로나에도 아침은 온다. 그날이 계속되면 사랑은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베로나의 작은 식탁에서 두 사람은 사소한 말다툼을 했을까? 로미오는 무뚝뚝해졌을까? 줄리엣은 침묵 속에서 무엇을 견뎠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사랑은 죽음과 함께 멈췄고, 바로 그 순간은 사랑은 영원이 되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고, 사라지고, 떠나가는 것이 삶이다. 백 년을 함께하며 변치 않는 사랑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과 인내, 상처와 시간의 무게를 견뎌내며 붙들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을 지켜내는 일이 더 어렵다.
현실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거칠다. 그것은 따뜻하지만 때로 차갑다.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면 매일, 처음의 그 설렘과 느낌을 다시 불러내야 한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런 이상향에 살지 않는다. 아침 식탁과 저녁 대화, 엇갈리는 감정과 어긋나는 일상을 산다. 영원한 사랑이란,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매일을 견디며 지켜가는 일이다.
시절 여행을 떠나다
그렇다면 M이 찾는 영원은 무엇인가? 사랑인가, 시간인가, 아니면 기억 속의 한 장면인가. 무엇이 되었든 M의 기억 여행은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시절의 자신을 만나기 위한 시절 여행이다.
M의 기억 속 어느 순간은 멈춰 있다. 가을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난 계절이다. 브람스의 <헝가리안 무곡 5번>이 흐르던 <약속> 카페의 가을, 미셸 르그랑의 선율이 들리던 <쉘부르의 우산>의 가을. 그 가을들은 시간 밖으로 올라가 변하지 않는 빛으로 남았다.
M이 찾아 나서는 것은 바로 그 멈춘 시간 속의 자신이다. 상처받은 자신, 아파했던 자신, 그리고 영원을 믿었던 자신을 찾는 것이다. 기억 여행은 결국 M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일이다.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다.
가을이 흐르고 있을 때는, 그것은 지나가는 계절에 불과했다. 하지만 떠나보내고 난 뒤, 그 시간은 멈춰버렸다. 그리고 그 가을은 M에게 신화가 되었다. 일상은 전설이 되고, 현실은 영원이 되었다. 적어도 M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