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안개 속이다.
안개가 모든 것을 삼켰다. 불안해야 마땅했다. 그 아득함과 쓸쓸함에 나는 설렌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깊은 안개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명확한 것보다 모호한 것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완전히 드러난 것보다 반쯤 가려진 것이 더 매혹적이다. 우리는 확실함을 추구한다. 하지만, 삶은 안개 속일 때가 많다. 쉽게 투명함을 보여주지 않고 흐릿하다.
예전에는 달랐다. 어느 해인가, 안개가 나를 덮칠 때였다. 용기가 뭔지, 자존감이 뭔지 몰랐던 시절에 나는 무너졌다. 살면서 뼈저리게 후회하는 순간은 바로 그때였다. 불안 속에서 나약한 본성이 드러났을 때, 나는 싸울 줄 몰랐고, 비겁하게 도망쳤다.
지금 돌아보면, 그 불안함과 나약함도 나였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제대로 된 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내면에 자리한 모순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비겁함, 나약함, 용기 없음, 그리고 무모한 꿈. 용광로의 불길이 치솟았다.
어느 날, 안개 속을 걷다 녹슨 이정표를 발견했다. 글자는 지워져 읽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날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정표가 없어도 괜찮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픔과 고통은 진실이 되어 지독하게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생각은 거짓말한다, 고통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생각은 거짓말한다, 고통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선언은 중세를 무너뜨렸다. 신의 손에 묶여 있던 인간은 드디어 자유 의지를 얻었다. 생각하는 인간은 창조할 수 있다. 신만이 아니라 인간도.
생각은 착각한다. 이성은 자기를 속인다. 우리의 판단은 자주 틀린다. 생각은 거짓말한다. 반면 아픔과 고통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슬픔은 조작되지 않는다. 아픔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것이다. 고통 속에서 소리치는 인간의 아우성은 내면에 숨겨둔 원초적 본능을 그대로 드러낸다. 생각은 나를 배신할 수 있지만, 고통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그 정도면 행복하지 않냐고? 내가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는 듯이. 내가 자주 슬픔에 빠진다고 말하면,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그러냐고, 너무 감상적이라고 덧붙인다.
이럴 때면 하이데거가 생각난다. 그는 "사람들"의 기대대로 사는 것을 "비본래적 존재"라 했다. 우리는 타인의 눈길을 의식하며, 부모와 친구들의 기대를 먹고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모두 비본래적 존재다.
반면 자신의 고통과 불안을 직면하며 사는 것, 그것을 "본래적 존재"라 불렀다. 그렇다면 나는 본래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본래적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인가. 나는 선택했다. 실존주의적 삶을.
고통의 미학
사람들은 아픔과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 내게 고통은 존재의 일부다. 이것을 없앤다는 것은 내 본질을 없애는 것이다. 내게는 깊은 고독이 있다. 나는 상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지우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붙들고 싶어 한다. 이 모순이 나다.
만약 그 상처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상처를 완전히 치유한다는 것은 내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이고, 어쩌면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슬프고, 아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웃기는 일 아닌가?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데, 나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그것으로 존재의 이유를 증명한다니. 이것은 병적 자기파괴일까? 마조히즘일까? 아니다. 내게는 고통의 미학적 전환이다.
칸트는 이것을 "숭고"라 불렀다. 폭풍우 치는 바다를 바라볼 때, 거대한 산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두렵다. 하지만 동시에 전율한다. 압도당하지만 바로 그 순간 존재의 격렬한 쾌락을 느낀다. 내 고통도 그렇다. 혼자서 슬픔을 응시하는 것이 더 진실하다고 믿는다. 일상적인 기쁨보다 깊은 슬픔이 더 의미 있다고 확신한다.
글쓰기라는 저항
내 모든 글쓰기는 아픔에서 나온다. 행복한 사람의 글은 유쾌하면서 경쾌할 것이다. 내 글은 무겁다. 고통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내용이 많다. 따지고 보면, 내게 글은 결핍의 언어다. 애초 내게 고통이 없었다면, 글을 썼을까? 글을 썼다 해도, 예리함은 무디고, 쓸 거리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택한다. 편안함보다 고통을.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미 사라진 것, 혹은 존재한 적 없었을지도 모르는 대상"에 대한 슬픔이 가장 깊은 감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 "부재의 현존"을 느끼며 산다. 사람들은 상실을 슬퍼한다. 나는 그 슬픔조차 소중하게 여긴다.
일본의 미학적(美學的) 표현인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가 있다. 사물의 슬픔. 활짝 핀 벚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영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곧 떨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덧없고 사라진다는 깨달음. 그 슬픔이 아름답다.
슬퍼할수록 더 슬퍼지고 더 아프다. 나는 사라진 것들과 그로 인한 슬픔을 글로 쓴다. 고통을 문장으로 옮기고, 덧없음을 단어로 번역한다. 상실을 글로 바꾸고, 부재를 현존으로 전환한다. 내 글쓰기는 취미가 아니라 강박이자 저항이고 생존이다. 그러니 누가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는 애초부터 관심밖이었다.
존재의 증명
내게 글쓰기는 치유가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망각에 대한, 죽음에 대한 저항이다. 고통과 슬픔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여전히 아프다. 나는 말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존재하게 한다고.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즐겁게 지낸다. 그것도 아름답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화해하며 산다.
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일부러 고통을 찾는 것은 아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더 깊이 사유하고, 더 격렬하게 느끼고, 더 진실하게 존재한다. 명확함보다 모호함, 그리고 쓸쓸한 안개를 택한다. 그것이 나다.
나는 아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