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경계

by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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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저물고

2025년 12월 31일 밤. 시계는 자정을 향해 걸어간다. 아니면 벌써 2026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달력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턱 앞에 서 있다. 우주는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지구는 태양을 도는 궤도 위에서 아무런 표식 없이 회전한다. 별들은 변함없이 깜빡이고, 당신의 심장은 작년과 크게 다름없는 리듬으로 뛴다.


시간에는 얼굴이 없다. 흐르는 시간의 강에는 둑이 없다. 우리는 그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물결을 볼 수 없고, 흐름의 속도를 잴 수도 없다. 다만 느낄 뿐이다. 피부에 스치는 미세한 떨림을,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우리는 시간에 경계를 긋고, 그 경계선에 이름을 붙인다. 2025년 12월 31일, 2026년. 1월 1일. 시간의 경계가 없다면 우리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경계를 짓지 않는다면, 시간은 그저 무한한 현재일 뿐이었을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의미도 방향도 없는 영원한 지금. 그 광막한 허공 속에서 인간은 숫자를 세고, 날을 나누고, 해를 구분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등불을 밝히듯이.


유난히 힘들었다는 말은

어느 해라고 다사다난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12월 31일 밤,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한다. "올해는 유난히 힘든 한 해였어." 20대 청년도, 중년의 직장인도, 은퇴를 앞둔 사람도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왜 모든 해는 "특히 더" 힘든 해일까?


우리 뇌는 최근 경험을 과대평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난주 상사와의 갈등, 한 달 전 건강검진 결과, 석 달 전 이별의 아픔은 생생하다. 하지만 2년 전, 5년 전의 위기들은 이미 희미해져 "그래도 그땐 괜찮았지"라고 위안한다.


지금, 이 순간의 무게는 과거의 어떤 순간보다 무겁다. 지금 겪는 고통은 실재하고 절박하다. 과거의 고통은? 이미 '견뎌낸' 것이 되었다. 고통은 시간과 함께 약해진다. 3년 전 밤새 울었던 일은 이제 "그런 일도 있었지"가 되고, 5년 전 절망했던 순간은 "그래도 이겨냈네"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같은 말을 한다. 올해가 유난히 힘들었다고. 이것은 착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슬픔과 아름다움의 경계

경계는 상실의 언어다. 이쪽과 저쪽이 나뉘고, 이곳과 저곳이 구분된다. 시간의 경계는 더욱 절대적인 상실이다. 한 해가 끝난다는 것은 그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2025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365일, 그 안에서 웃고 울었던 순간들, 사랑했던 사람들, 읽었던 책들, 들었던 음악들. 그 모든 것이 '과거'라는 이름의 창고로 들어간다. 우리는 문을 닫고 열쇠를 돌린다.


하지만, 이 슬픔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불교의 무상(無常) 사상은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하지만, 그 가르침의 핵심은 변화의 부정이 아니라 변화의 직시다. 한 해가 간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해를 진정으로 살았음을 고백하게 된다. 경계를 긋는다는 것은 "여기까지 내가 살았다"라고 말하는 행위다.


연말의 감상은 늘 그러하다. 끝나는 것을 슬퍼하는 동시에, 끝낼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품는다. 시간의 경계선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간을 여는 문이다.


2025년은 가지만, 우리가 사랑한 것들, 깨달은 것들, 견뎌낸 것들은 남는다. 시간은 흘러가도 의미는 쌓인다. 2025년의 모든 순간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올해 읽은 책, 나눈 대화, 흘린 눈물, 터뜨린 웃음이 모두 우리라는 존재의 지층을 이룬다.


고독, 그리고 연대

시간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고독한 경험이다. 우리는 모두 2025년 12월 31일을 함께 살지만, 각자의 시간은 다르다. 당신의 2025년과 내 2025년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시간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고독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모두가 각자의 시간 속에서 고독하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한다. "올해 유독 힘들었다"라고 느끼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같은 인간의 조건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자정의 종이 울리면 우리는 환호한다. 마치 자정의 종소리가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처럼. 그러나 2026년 1월 1일 00시 01분의 당신은 2025년 12월 31일 23시 59분의 당신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변화는 자정의 폭죽처럼 극적으로 오지 않는다. 변화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하루를 살아내고, 밤에 잠들며 조금씩 쌓인다. 물밑의 퇴적물처럼. 2026년의 어느 날, 문득 "내가 달라졌네"라고 느끼는 순간이 올 것이다.

매년 "특히 힘든 해"를 반복하는 우리는, 그래서 살아있다. 여전히 아파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강에 띄우는 등불

오늘 밤, 우리가 시간에 경계를 긋고 의미를 부여하는 이 행위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존재의 증명이다. "나는 여기 있었다. 나는 이만큼 살았다. 나는 이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경계 없는 시간의 강에 우리는 작은 등불을 띄운다. 2025년이라는 이름의 등불, 2026년이라는 이름의 등불. 그 등불들은 강물 위를 떠내려가다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누군가는 말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라고. 인간은 단순히 살아간다는 것,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존재를 의미로 변환시키고 싶어 한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의미가 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경계 없는 것에 경계를 긋고,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어둠 속에서 등불을 밝히는 존재. 그 행위가 때로는 헛되어 보일지라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몇 시간이 지나면 2025년은 사라진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은 이미 2026년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강에는 둑이 없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등불이 있다.


이제 숫자는 바뀌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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