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그리다

by Henry

50호, 아마추어의 도전


그림을 부탁받았다. 50호, 117×80cm. 긴 쪽이 1미터가 넘는다. 샘플로 받은 것은 유화로 그린 태양 그림이었다. 붉고 노란 색채가 캔버스 위에서 두툼하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것을 수채화로 그려야 한다. 유화의 농밀한 질감을, 겹겹이 쌓아 올린 붓질의 흔적을, 투명한 수채화의 언어로 옮겨야 한다니.

그림을 그린다고는 하지만 나는 아마추어다. 취미 삼아 20호, 30호 정도를 그린 게 전부다. 50호는 처음이다. 처음에는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막상 화지 앞에 앉으니, 손이 긴장됐다.

한동안 그림을 그렸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가끔 아크릴로 그렸지만 주로 수채화였다. 물의 양에 따라 색이 어떻게 번지는지, 붓의 압력으로 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런 느낌이 손끝에 있었다. 그러다가 3년 가까이 붓을 놓았다. 그사이에 모든 것을 잊었다. 아마추어의 실력이란 그렇다. 쓰지 않으면 녹슨다. 손이 잊어버렸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조건으로 '적절한 난이도'를 꼽았다. 너무 쉬우면 지루하고, 너무 어려우면 불안하다. 한동안 손을 놓은 탓에 기량은 한참 떨어져 있었다. 가뜩이나 아마추어인 내게 공백은 치명적이다. 50호는 실력을 훨씬 넘어서는 과제였다. 나는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불안 영역'에 서 있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유화에서 수채화로의 전환. 유화가 '더하기'의 예술이라면, 수채화는 '빼기'의 예술이다. 유화는 실수해도 색칠로 덮을 수 있다. 수채화는 색칠을 덧붙일수록 탁해진다. 첫 붓질이 곧 최종 결과다. 유화는 기다려주지만, 수채화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두 세계는 전혀 다른 시간성을 요구한다. 전문 화가는 문제가 안 되겠지만, 나 같은 아마추어에게는 숙제다.


수채화의 투명함을 잊었다


아르쉬 황목을 주문했다. 수채화 작업에 좋다는 고급 화지다. 2절 사이즈로 먼저 연습하기로 했다. 붓에 물을 머금고, 물감을 풀고, 종이 위에 색을 얹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덧칠을 거듭할수록 그림은 탁해졌다. 수채화의 첫 번째 원칙. 투명함. 한동안 그것을 잊고 있었다.


겨우 익혔던 손끝의 감각이 녹슬었다. 물감을 개는 농도, 붓에 머금는 물의 양, 종이가 물을 받아들이는 타이밍. 손이 기억하던 것들이 모두 낯설어졌다.


수채화는 덧칠을 반기지 않는다. 물의 비율이 높을수록 빛이 종이를 투과하며 투명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물감으로 자주 붓질하면 물감의 층이 쌓이며 빛의 투과가 막힌다. 유화처럼 덧칠로 깊이를 더할 수도 없다. 그래서 첫 번째 붓질이 곧 최종 결과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탁해진 화지를 바라보며 무력감이 밀려왔다. 물의 양을 조절하고, 붓의 압력을 바꿔보고, 물감의 농도를 달리했다. 결과는 매번 비슷했다. 투명해야 할 색이 흐려졌고, 맑아야 할 빛깔이 탁했다.


제대로 된 게 있을까


며칠을 방황했다. 아는 화가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부탁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맞지 않았다. 화실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집에서 혼자 붓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방황의 실체는 재능의 한계를 마주한 무력감이었다. 재능이 부족한데 기술마저 없다니. 화지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그림뿐만 아니다. 쇼팽의 녹턴을 연습하지만, 남에게 들려줄 만한 수준은 아니다. 에세이를 쓰지만, 상을 받거나 게재할 작품은 나오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지만, 전시회를 열 수준이 아니다. 노력해도 재능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탁한 그림은 단순한 실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한계를 눈앞에 보여주는 증거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서툴고,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왜 이리 고통스러운가.

물이었다


고민만 하다가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화실로 갔다. 다시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손이 움직였다. 물을 충분히 머금은 붓으로 종이를 적셨다. 그 위에 물감을 살짝 얹었다. 색이 번지며 스며들었다. 붓질의 자국이 남지 않았다. 빛이 종이를 통과했다.


물이었다. 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투명도가 달라진다. 유화는 쌓아 올리는 것이지만, 수채화는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유화는 덧칠할수록 깊어지지만, 수채화는 덧칠할수록 탁해진다. 그 차이를 이제야 겨우 이해했다.


수채화의 투명한 그리기는 동양화의 '여백'과도 통한다. ‘산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워두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수채화의 투명함도 마찬가지다. 종이의 하얀 바탕이 빛을 반사하며 색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색을 통제하려 들수록 그림은 죽고, 물이 스스로 색으로 흐르게 내버려 둘 때 그림이 산다. 노자의 무위(無爲)와 맞닿았다.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할 때 자연스러움이 드러난다.


재능의 한계와 마주하기


재능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는 용기다. 나는 전문 화가가 아니다. 하지만 물과 물감의 관계를 이해하고, 종이의 성질을 존중하며, 시간을 들여 연습할 수는 있다. 재능은 타고난 축복이지만, 인내와 집중은 선택할 수 있다.


태양 주변의 색감. 노랑에서 주황으로, 주황에서 붉은빛으로 번지는 그러데이션. 종이가 젖어 있을 때, 물감이 스스로 흐르게 두는 것. 인위적으로 경계를 만들지 않는 것. 물과 물감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


심리학자 히긴스는 우리 내면에 세 가지 자기가 존재한다고 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 늦은 나이에 수채화를 시작한 나는 '물과 물감을 자유롭게 다루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초보자'일 뿐이다. 이 간극 속에서 나는 매일 실망하고 좌절한다.

화실에서 20대 대학생이 단숨에 그라데이션을 완성하는 것을 본다. 인스타그램에서 아마추어 화가가 올린 완벽한 풍경화를 본다. 그때마다 부러움이 인다. 시샘이 인다. 이 비교는 나를 자극하지만 동시에 상처를 준다. 캔버스 앞에 서면 솟구치는 무능감이 견디기 어렵다. 효과적이고 능숙하다는 느낌, 그것을 본능적으로 갈구한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완벽주의를 '수치심의 방어 기제'라고 했다.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고통스러운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벽을 추구한다. "전문 화가가 아니다"라는 자격 박탈감, "어중간한 재능"이라는 자기 평가. 이것들은 모두 수치심의 징후다.

브라운은 말한다. 해독제는 '취약성의 수용'이라고.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용기라고. 재능의 부족을 인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인정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나는 괴로워한다. 이상을 포기하고, 비교를 멈추고, 무능함을 받아들이고, 완벽주의를 내려놓는 일. 그것은 유능한 나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는 일이다.

늦게 시작한 수채화, 아무리 연습해도 전문 화가, 아니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현실. 이것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는 실존적 한계와의 대면이다. 되고 싶은 나도 아니고, 현재의 나도 불충분하다.

투명하게, 천천히, 불완전하게


방황과 좌절 끝에 찾은 해법은 결국 '기다림'이었다. 어중간한 재능을 받아들이는 겸손이었다. 부러움과 시샘을 억누르고 다시 황목 위에 물을 적신다. 붓을 든다. 큰 붓으로 색칠했다. 태양은 마스킹액으로 가렸다. 이것을 벗기면 태양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물과 물감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을 초월하는 지혜다. 투명하게, 천천히, 불완전하게. 통제를 포기하고 과정을 신뢰할 때, 비로소 괴로움은 겸손으로 바뀐다.

월,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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