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정류장의 건물과 간판
햇빛은 색을 흐리고
달빛은 기억을 흐리고
세월은 마음도 변색을 하지
가끔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양양으로 여행을 간다. 양양 버스터미널은 수십 년이 동안 한 자리에 있었다. 켜켜이 쌓인 흔적만큼이나 시간의 때가 덕지덕지 붙었다. 간간이 덧대기 공사를 해도 건물은 해졌고, 대합실 벽은 누렇게 변했다. 처음 칠할 때 눈부시게 하얀 벽의 색이 변했다. 벽지도 창문도 낡고 원래의 맑고 깨끗함을 잊어버렸다. 그간 몇 번이나 덧칠한 탓에 벽은 낡고 어두운 색으로 변했다.
양양은 아름다운 해변으로 옛날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넘쳐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 정류장을 이용했는지 셀 수 없다. 한때 수학여행으로 붐비던 시절에는 전국에서 이곳을 한 번쯤 스쳐 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최근에는 윈드 서핑의 명소로 알려지는 바람에 사람들로 넘쳐난다.
처음 이곳이 지어졌을 때는 깨끗하고 참신했다. 흰색 페인트를 칠한 벽은 눈부시게 밝았다. 사람들은 새로 지은 대합실에 앉아 먼 길 떠날 생각에 마음 들떴다. 아쉽게도 흐르는 세월은 색을 변하게 했고, 빛바랜 흔적만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었다. 지난 8월 양양 버스터미널은 새로 단장한 건물로 이사했다. 이제 낡은 벽과 건물은 추억 속에만 남았다.
시간이 이 지나면 색은 변하고 어두워진다. 심지어 그림 속의 색도 변한다. 하얀 벽면은 누렇게 변하고, 그림 속 하얀색도 어두워진다. 시간이 지나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색채라고 별수 없다. 아무리 잘 보존해도 변색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참 신기한 일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다. 그렇지만 루브르 박물관 전시실에 잘 보존한 모나리자도 색이 변할 줄은 몰랐다. 색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세상의 모든 물질은 결국 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시차는 있지만, 세상 모든 것은 빛바래고 변색하고 결국 사라진다.
거창하게 삼라만상이 변색하는 이야기를 했다. 다시 색이 변하는 이야기로 돌아가자. 염료(染料)와 안료(顔料)는 물체에 색을 입히는 색소(色素)이다. 이들을 만드는 원재료에는 식물과 청금속 같은 광물질도 있다. 최근에는 화학적으로 만들어 낸 색소도 많다. 어떤 색소라도 그것의 본질은 원소와 원소가 결합한 분자로 구성된 물질이라는 뜻이다.
벽의 흰색이 바랜 것은 흰색 물감 속의 분자 구조, 즉 원자와 원자의 결합 형태가 변했기 때문이다. 색소의 구성 성분인 원소들이 빛, 온도, 습도, 공기와 만나면 원래의 원자들과 결별하고 이들 속에 있는 원자와 결합한다. 그렇게 되면 분자 구조가 달라져 원래의 색을 유지할 수 없다. 하얀 벽에 칠해진 흰색 물감의 화학적 결합이 끊어지고 새로운 결합으로 바뀐다. 그 결과 최초의 흰색은 누런색으로 변하고, 시골 정류장의 벽은 색이 바래진다.
강한 햇빛은 색은 색소의 원자와 원자의 연결고리가 끊어버린다. 특히 자외선은 에너지가 높아 염료 속에 들어 있는 원자와 원자의 연결을 파괴한다. 원자와 원자의 결합이 변하면 물질의 성질을 결정하는 분자 구조가 바뀐다. 그 결과 원래의 색상이 다른 색으로 변한 게 된다. 강한 햇빛에 옷감을 오래 두면 색깔이 변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물감 속에 들어 있는 구리나 납의 성분이 공기나 습기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색이 변한다. 공기 중의 산소 원자와 결합한 색칠 속의 구리는 산화되어 누런색을 띠게 된다. 물감의 원소가 공기나 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면서 원래 가졌던 색의 분자 구조가 변하는 것이다.
색이 변하고 벽지가 헤어지는 주요 원인은 그 내부에 있다. 그것이 외부 환경과 만나면서 변하고 바뀐다. 색이 바래는 이유도 물감의 내부 구성 성분이 공기 등 외부 환경과 만났기 때문에 변색한다. 사람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옳은 생각이라 해도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시골 정류장이 변색하는 것도 까닭이 있고, 우리 생각이 바뀌는 것도 이유가 있다. 살기 위해 생각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는 것이 우리 생활이다.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하고 딸린 식솔이 많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변색하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다. 보통 사람들이 변심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액자 속 그림처럼 우리 삶에도 보호장치가 있다면 올곧은 생각을 오래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