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가려고 연쇄 이탈
"의대 가려고" 연쇄 이탈... 대학들, 대면 상담·AI 도입까지 한 대학이 생겼다. 지난해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재학생 천 8백여 명이 중도에 학교를 그만뒀다. 대부분은 의학 계열로 진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수록 심해지는 의대 쏠림 현상, 그 때문에 도미노처럼 학생들이 다니던 대학에서 이탈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대학들도 발 벗고 나섰다.
오늘 아침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니 어제 밤늦게 YTN에서 보도한 기사가 올랐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이런 이야기가 심심찮게 보도된 탓에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입맛이 쓰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해가 갈수록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질 것이고, 의과대학 진학 열풍이 더 거세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다고 그걸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교육시장은 펄펄 끓는 욕망의 용광로라 할 수 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했는데, 욕망이 들 끊는 시장이라는 표현이 거슬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현실의 교육은 살아남으려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자녀가 중산층으로 살기를 바라는, 그런 다양한 욕망이 분출되는 곳이다. 대학 이름으로 모든 것이 결판나는 우리 현실에서 재수 아니 삼수 혹은 그 이상을 공부해서라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는 열망을 꺾기 힘들다. 그것도 모자라 의대에 진학하려는 열풍이 불어닥친 우리 사회의 팍팍한 현실이 더 문제다.
흔히 우리 사회를 능력 중심의 사회라 부른다. 진짜 100% 능력만으로 평가하는 사회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 능력이 있으면 삶이 나아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능력을 갖추기 위해 모두 열심히 노력한다. 하긴 누군가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도 능력”이고, 어느 드라마에서는 “부잣집에서 태어나는 것도 능력”이라고 말했다. 이미 출발선이 다른 그런 상황조차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능력 제일주의가 부른 공정하다는 착각
하버드 대학의 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Michael Joseph Sandel)은 『공정하다는 착각』(와이즈베리, 2020)에서 “능력만 있으면 성공한다는 신화는 능력주의를 맹신하게 만든다.”라고 지적했다. 샌델은 능력만으로 개인을 재단하는 능력 제일주의의 신화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샌델의 주장을 빌려 설명하면, 지금처럼 능력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모든 성공과 실패를 오직 개인의 능력만으로 판정한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거나 명문대학을 진학하지 못하면 그 책임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 된다. 가난 집안에 태어나는 이유로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도 능력이 없는 것으로 낙인찍힌다.
반면에, 운이 좋아 좋은 집안에 태어나 조기 교육을 받고, 좋은 스펙을 쌓은 것도 능력으로 인정받는다. 이들은 처음부터 저만치 앞서서 출발하고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능력자로 대우받는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실제로 능력을 갖췄고, 대우받을 자격이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출발선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능력을 판정하는 것이 옳은가.. 미국이나 한국이나 어디서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들의 아낌없는 경제적 후원 덕분에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예가 허다하다. 그렇게 해서 받은 명문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평생 안정된 삶을 산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능력이고, 특권을 평생 독점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합당한가를 센델은 지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험생은 자기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좋은 대학을 진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더 나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하고, 이도 저도 아니면 재수나 삼수 혹은 그 이상의 N수를 불사하려 한다. 능력주의의 지표인 대학 학벌을 손에 쥘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오죽하면 ‘국적(國籍)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學籍)은 바꿀 수 없다'는 말에 목숨까지 거는 것이 능력 제일주의를 숭배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재수나 삼수 아니 N수가 정답일까
엄수정·송요성의 연구보고서 『대입 N수생의 삶과 문화』(경기도교육연구원, 2021)을 보면 이런 상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지금부터는 이 보고서에 나오는 글을 인용했다.
“매우 안 좋았죠. 자신감이 되게 떨어져요. 자신이 노력한 만큼 뭔가를 돌려받아야 되는데 돌려받지 못하니까. 그런데 제 노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제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되게 힘들어져요. 그런 생각들 자체가”라고 지방소재 교육대학에 합격한 학생의 말이다.
“맹목적인 믿음이 있어요. 학벌이 올라가야 더 나은 삶을 산다는 것을 모두가 당연시 여겨요.”라고 N수생이 말한다. m는 앞에서 대학으로 인해 자신감이 떨어지고, 자기 능력이 의심된다고 말한 학생이다. 그의 이 말이 왜 N수를 하는지를 대변하고 있다.
노력은 했는데 소위 명문대학에 합격하지 못했기에 자기 능력을 의심한다는 말에 능력주의로 평가하는 사회의 모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연구보고서에서는 능력주의는 좋은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상식적’ 기준을 결정하며, 사회구성원들의 욕망을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보고서는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의 욕망은 승자가 독식하고 경쟁에 이기는 자가 많은 것을 차지하는 자본주의의 욕망과 결합하다고 지적한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능력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보고서에서는 자녀가 적어도 중산층으로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욕망,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가고자 하는 N수생의 욕망, 더 좋은 스펙과 성적의 지원자를 뽑고자 하는 대학의 욕망, 대학 간판으로 ‘증명된’ 능력자를 선택하려는 고용인의 욕망, 사교육 시장에서 이윤을 획득하려는 기업의 욕망이 얽혀 지금의 N수 열풍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좋은 대학을 위한 욕망, 더 나아가서 의과대학 진학을 위한 욕망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욕망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의치한'이라면 7수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엄수정·송요성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연구 참여자들은 자신의 대입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N수를 선택했다고 보았으나, 그들의 선택은 온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선택은 능력주의 사회의 광적인 교육열, 교육에 대한 가족의 기대와 신념, 사회·경제적 지위, 대학 입시 체제, 교육 제도, 산업 구조, 노동 시장, 자본주의 체제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힘을 그런 구조 안에서 생성된 것이라 말한다.
우리는 입시경쟁에서 살아남아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능력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안정이 보장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메시지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좋은 안정된 삶이란 소수의 ‘승자’에게만 허용된 것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좋은 대학 진학이라는 것이라면 수험생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다. 학벌이 한 번 결정되면 만회할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자연스레 N수생의 길에 접어든다.
더 심각한 것은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이 “의치한‘이라 불리는 의과대학, 치과대학, 한의과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반수(半修) 혹은 재수를 위해 학교를 떠난다는 사실이다. 소위 SKY대학에 합격한 학생들 중 상당수가 등록을 포기한다. 이들 중 일부는 6수를 하든, 7수를 하든 “의치한’에 가기만 하면 전문 자격증을 얻고 돈도 더 많이 벌고 취직 문제도 걱정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들만의 욕심일까. 오죽하면 이렇게 까지 할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우리 사회가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왜 머리 좋은 아이들이 '의치한'으로만 몰릴까.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공과대학으로 가야 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찬다. 그 말의 절반을 이해할 수 있지만, 나머지 반까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부와 신분을 대물림하는 현실에서 흙수저 집안의 아이가 이런 목표를 가진다면 그걸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런 선택이 자유의 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가 그것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를 냉철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