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경제학 14】
어머님, 초등 6학년이라고요? 의대반은 늦었습니다!!
”아이를 의대 보내고 싶어요 “
”어머니, 초등 6학년이라면 너무 늦었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니 초등 6학년인데요?“
”의대에 보내려면 최소 초등 4학년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
엄마는 초등학교 6학년 딸을 데리고 수학학원을 찾았다. ‘의대반’이 있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세상이 다 아는 일을 아직도 모르다니 순간 자책한다. 어쨌든 이 사실을 안 엄마는 자기 아이도 의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학원 관계자와 대화를 나눴다.
‘초등학교 6학년인데 벌써 늦었다고?’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무슨 학원 의대반에 들어가는 데 나이 제한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이 엄마는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정신이 혼미하고 어안이 벙벙하다. 나만 바보가 된 기분에 자존심도 상하고 속이 뒤집어진다.
아니 우리 애가 어디가 어때서 ‘의대반’에 들어가지 못한단 말인가. 갑자기 부아가 치민다. 하지 말라면 더하고 싶고, 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자식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가시밭길 마다치 않는 엄마가 호락호락 물러날 리 없다. '그래!! 해보자' 하고 결심한다. 드디어 의대를 향한 험하고 먼 길을 떠난다.
이런 엄마가 있는가 하면 반대의 엄마도 있다. 남들 다 의대 보내려고 환장하지만, 우리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지 그깟 의사나 판사가 문제냐? 나는 진정 아이가 행복한 일을 하도록 해 줄 것이다. 절대 시류에 흔들지 않고 아이가 선택하는 대로 밀어줄 것이다. 아이의 장래를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준다. 이 시기에 이런 결단을 내리다니 이상적인 엄마로 보인다.
어머님, 따님 의대반 힘내세요!!
아이의 진정한 행복이 뭘까? 아이가 추구하는 가치를 끝까지 지킬 힘이 있는가? 그 힘은 돈에서 나온다. 아니 우아하게 경제력이라고 말하자. 궁핍하지 않게 살만한 재력이 있으면 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야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큰돈을 벌지 않아도 기본 재산이 넉넉하다면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
도대체 재산이 어느 정도면 이게 가능할까? 아이가 커서도 지금 재산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어쩌면 부모들은 충분한 재력만 있다면 아이를 닦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와 엄마는 공부에 휘둘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안타깝게도 경제력이 부족하다면 가혹한 경쟁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득도한 수도승이 아니고서야 결심만 한다고 진정한 행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자기 능력과 노력만으로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의 길잡이이자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이들은 성공의 길이 얼마나 어렵고 혹독한지 잘 안다. 그래서 자기가 이룩한 성공의 열매를 자식에게 물려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자식들이 열매를 따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들은 자신이 오른 성공의 사다리를 멀리 걷어차 버렸다.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자본주의는 병들었다. 공정한 기회는 사라지고 기득권이 설친다. 신분적으로 평등하고, 성공의 기회가 공정한 것이 자본주의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점차 없어지고 있다. 공정한 기회는 교과서에서나 찾을 수 있다. 경제력에 예속된 신분과 출발선이 다른 공정을 보면서 자본주의의 남은 장점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다.
"어머님, 따님 의대반 힘내세요!!"
오죽하면 이렇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까. 이것이 바람직하냐의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경제적으로 덜 불안하게 사는 길이 의대 진학이라면 누군들 도전할 수밖에 없다.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털어서라도 내 자식만은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자식이 그 길을 스스로 가고자 한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밀어주는 게 부모 마음이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감히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이 경우에 인용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마음속에 욕망을 가지고 산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나마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는 지극한 영광을 가졌다. 그런 행운을 갖지 못하는 가난한 이가 자식을 의대 보는 길이 너무나 험난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꿈조차 꾸지 못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그걸 어찌 비난만 할 수 있겠는가.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남아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한 가지만 꿈꾸지 않아도 된다. 기회가 공정하다면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희망이 있다. 현실은 덜 고달프고 덜 힘들 것이다. 그러면 굳이 초등 4학년 의대반을 갈 이유가 없다. 그러나 문밖을 나서면 찬 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 들판이다. 한 발 삐끗하면 절벽으로 떨어진다. 이런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초등 4학년 의대반의 이면에 숨은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바라보면 기분이 씁쓸하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은 늘 선택을 강요한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그 선택의 결과도 가혹하다.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부모의 고민이 무척 깊다. 세상이 어느 부모가 자식을 공부하라고 다그치고 싶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