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는 에게해에 별장에 살려했는데
자유인으로 창공을 훨훨 날고 싶었는데
비 갠 동해의 바다를 걸으며
낯선 설렘의 에뜨랑제로 살고 있어
에게해의 별장에 살 거라고
고등학교 때였을 거야.
세계사 시간이었나
지리 시간이었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에게해 이야기가 나왔어.
남에게해의 산토리니
와, 까무러치게 예쁜 풍경에 놀랐어
‘빛에 씻긴 섬’이란 이름처럼
해와 달이 색칠한 섬이라
눈이 휘둥그레졌어
수학여행 때
스치듯 바다를 본 기억뿐인 나로서야
태양 아래의 짙푸른 물결과
하얀색 건물은 신비감을 자아냈지
그래, 바로 이 거야!
50대에 나는 이곳에 살 거야
아침마다 정성스레 내린 커피를 들고
하얀 모래밭을 거닐 거라고 다짐했어
삶은 여유롭고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고
‘그리스인 조르바’보다
더 자유로울 거라고 믿었지
지금 어떠냐고?
그 꿈대로 되었다면
오늘도 나는 에뜨랑제가 되어
어느 바닷가를 헤매는 일이 없겠지.
코발트 동해나
노을 지는 서해
어느 곳에도 별장은 없지만
삶은 꿈꾸는 순간이 행복하다고
그렇게 되뇌며 나를 위안하지
이루지 못한 꿈은
스마트폰 위에서
검정 글자들의 물결로 흐르고
에게해의 파란 물결이 아니라도
그게 무슨 대수냐며
동해의 바닷가에서
치기 어린 청춘의 한때를 떠올리고 있어
흐린 동해의 아침
간밤 내린 비에
쉬 잠들지 못한 바다는 밤새 몸을 뒤쳤였어
겨우 비 그치고
하늘에는 짙게 드리운 구름
해는 얼굴 내밀 생각이 없고
덕분에 바다는 모처럼 게으름을 피우고 있어.
갈매기 한 마리가 낮은 포물선을 그리고
부지런한 어부는 만선의 꿈을 안고 먼바다로 떠나는
첫새벽 잠에서 깬 나는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 아래 물색 흐린 바다를 봐.
낯선 도시의 해안을 거닐며
에게해의 쪽빛 물결을 떠올리며
바다면 다 바다지
꼭 그곳에 야 맛이냐고
이만하면 됐노라고 스스로를 위안해
에뜨랑제!!
먼 이국의 단어를 읊조리며
고독마저 감미로운 시간 속에
겁 없는 청춘의 한때
꿈꾸던 에게해를 멀리로 두고
날 흐린 동해를 바라보고 있어.
무딘 익숙함보다 낯선 설렘으로
일찍 잠에서 깬 바다는 한결 편안한 얼굴이다.
새털구름인지 양떼구름인지
하얀 구름 몰고 온 하늘은 해사한 얼굴로 해안 도로를 내려본다.
멀리 점점이 앞선 이들의 뒤로
해풍은 날것 그대로의 바다 내음을 싣고 온다.
포구는 늘 분주하고
해녀의 튼실한 어깨가
아침 햇살에 눈 부시다.
물속 깊이 자맥질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해녀의 망태에는 청정 바다가 가득하다.
철이 이른 해변의 아침은 조용하다.
긴 해안 도로를 걸으면 바다는 넉넉한 풍경을 안겨준다.
방죽 사이 어느 해녀가 놓고 간
빈 바구니만 물살에 이리저리 몸을 맡긴다.
온통 가득한 코발트블루를 뒤로 하고
도시의 회색빛 속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낯선 설렘과 달콤한 고독을 뒤로하고
익숙해져 무딘 편안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몇 날 아니 몇 달을 머물러
눈에 익지 않은 풍경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꾸밈없이 지내고 싶다.
야속하게도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시간은
그만 돌아가라고 채근한다.
떠나올 때 여행 가방에 빈틈없이 설렘을 꼭꼭 채웠다.
이제 그것들을 모두 비우고 아쉬움을 채워야 한다.
며칠이면 벌써 가방에는 그리움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이방인의 꿈을 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