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다 답답한 마음이 들면 작은 창문 사이로 밖을 내려다봤다. 거리엔 '하하 호호'웃는 사람들이 보였다.
'퇴근하는가 보네'
이른 저녁 시간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오전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는 학원강사의 삶을 살던 나는 그저 마음 편히 저녁노을을 보는 삶을 원했다. 일은 하다 보면 재밌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늘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었고, 늘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매일 좀비처럼 흐리멍덩한 눈,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학원에 출근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 덕분이었다. 어떤 날은 수업을 하다가 갑자기 눈에 눈물이 차올라서 그렁그렁해지기도 했다.
학생: 선생님, 왜 눈에 눈물이 고여있어요?
나: (예리한 녀석..) 너희가 열심히 공부하는 게 고마워서 그래
사실 버티는 게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났다. 그 당시 나를 힘들게 하던 말 못 할 여러 상황이 내 모든 희망을 앗아갔다. 그저 내가 죽어야 해결될 것 같았고,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버티기 힘든 순간에는 다시 정신과 약을 먹고 싶었다. 약을 먹으면 머릿속이 멍해지고 나쁜 생각을 조금이라도 멈출 수 있었다. 힘들 때면 다시 약에 기대어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다. 그럴 때면 가족이란 사람들의 잔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 약을 먹지 못하도록 겁을 주고 협박을 했다.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미움받고 싶지 않던 나는 먹던 약도 끊고 더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가족의 잔소리를 이겨낼 힘이 없어 병원에 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유튜브를 보거나, 영국 드라마 '닥터 후'를 보며 타임머신을 타고 어디든 날아가는 상상을 하는 것뿐이었다. 이렇게라도 했던 이유는 학원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매일 아이들의 웃음 한 번이 나를 살게 했다. 유일하게 나를 믿어주는 이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내가 좀 더 나아질 방법을 조금이라도 찾고 싶었다.
주말에 평소처럼 누워서 유튜브를 보는데 내 알고리즘에 차동엽 신부님의 영상이 떴다.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이라고 우기라'는 차 신부님의 말씀이 참 신선하기도 하고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분의 강의를 자주 찾아서 듣곤 했다. 마침 집에 차 신부님의 책이 있어서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후에도 책을 몇 권 더 사서 읽었다.
이분은 언제나 희망을 외치셨다. 계속 똑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약간의 짜증과 함께 그까짓 거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의 희망 타령 지겹다 지겨워. 한 번 해보면 될 거 아냐?
진짜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이라고 우기란 말이지?'
내가 처음으로 희망이라 붙잡은 것은 바로.....
'갈비구이'였다.
출처: yuri9092_pixabay
하도 사소해서 어디에 말하기도 창피할 지경이다. 뭐 별수 있나. 이게 사실인걸. 실제로 갈비 먹을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드디어 금요일, 불타는 금요일의 분위기에 맞춰 나는 불타는 열정으로 갈비를 열심히 구워 먹었다.
그리고 희한한 감정을 느꼈다.
'뿌듯함'
'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뿌듯한 감정이다'
실망하기 싫어 그 어떤 것도 기대하려 하지 않던 내게 희망 우기기 정신은 기대하는 삶의 기쁨을 어렴풋이 다시 일깨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