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좋은그녀 Jul 23. 2023

쉬어버린 감자탕

냉장고에 왜 안 넣었니.

포장한 감자탕으로 아침을 해결하려 했던 주부는 망연자실하게 됩니다. 어젯밤 분명히 팔팔 끓여놓고 잤는데 비가 많이 올 거란 예보에 창문을 죄다 꼭꼭 닫고 잤더니 밤새 가버렸습니다. 믿을 건 감자탕 밖에 없었는데 이를 어쩌나. 새벽에 눈이 떠진 이유도 라면사리 넣어 먹을 생각에 들떠서였는데 인생이 이렇게나 호락호락하지 않네요. 

주말 아침 좀 가볍게 먹으면 어떻냐마는 엊그제부터 남편의 몸이 좋지 않아 뭔가 뜨끈한 국물요리를 내놓고 싶었는데 욕심이었나 봅니다.

급하게 내놓을 수 있는 건 김과 달걀프라이 밖에 없는데 하고 뒤지다가 김치냉장고 저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제육볶음을 발견합니다.

'아직 내 인생이 나를 버리지 않았군'하는 기쁨으로 제육을 볶습니다. (남편의 애착메뉴 1위)

감자탕 없이도 아침을 잘 먹었고 디저트까지 먹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살다 보면 오늘 같은 날을 꼭 만나는데 그때마다 냉장고 속 제육 같은 무언가가 나를 도와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요. 


세상 사람 모두 나를 싫어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스스로 너무 무능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뭐라도 해야 되나 싶지만 괜히 나서지 말자 내가 뭐 도움 되겠어 싶기도 한 그런 무기력하고 눈물 나는 순간순간이 찾아올 때 생각도 못했던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는 거죠. 


몇 년을 연락 한번 안 하고 지냈던 지인이 전화하더니 뜬금없이 "네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너만 모르는 거 같아"라는 말을 툭하고 내뱉는다던지 

남들의 칭찬이 어색해 유교걸이 되어버린 저에게 "남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아니라는 말 좀 그만해."라고 조언하는 친구가 나타나거나

저녁은 뭐해먹나 하고 있는데 "없는 솜씨지만 나눠먹어요" 하면서 구세주가 나타나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자꾸 잊고 사는 거 같아요. 


쉬어버린 감자탕을 마주하는 일보다 냉장고 속 제육을 마주하는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르는데 자꾸 감자탕 원망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네요. 


문득문득 생각날 때라도 제육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아이의 방학이 시작되었고 3주 동안 먹고 놀 생각에 빠진 아이에게 제육 같은 부분이 분명 있을 테니 그 부분을 찾아보는 연습을 해봐야겠네요. 


한 학기 동안 정말 애써주신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마음이 미어져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차마 뭐라고 쓸 수도 없어 감사하다는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글 써서 돈 벌어 보셨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