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나는 기존의 개발 조직을 떠나 새로운 팀에 합류했다. 상위 리더는 변하지 않았지만, 직속 리더가 바뀌었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할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나름 포부를 가지고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 넣었지만 세상 일은 언제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합류한 지 한 달이 지난 3월, 이제 슬슬 새로운 팀에 적응하고 시동을 걸려던 찰나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이 글은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돌아보며, 최근에 느낀 점들을 회고하는 글이다.
그렇다. 나는 올해 새로운 조직에 합류했지만, 합류 한 달 만에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게다가 함께 일하던 팀 내 개발자 3명이 다른 조직으로 이동했다. 그 3명의 개발자는 내가 이 조직에 와도 되겠다고 결심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 상황은 더 큰 혼란으로 다가왔다. 결과적으로, 나는 낯선 조직과 낯선 사람들 속에서 프로젝트까지 중단된 상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 시기를 돌아보면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최고 혈압이 170을 넘나들기도 했으며, 갑작스러운 다한증과 습진으로 손바닥 껍질이 전부 벗겨지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제정신이 아니다 보니 나와 조직 주변인과의 관계도 점점 예민해져 갔다. 나는 상황이 빨리 해소가 되거나, 아니면 다른 대안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전사적으로 모두가 예민했던 시기였기에 커뮤니케이션도 어려웠고, 나 역시 큰 혼란을 겪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4월이 되었다.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할 수도, 프로젝트가 중단된 상황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을 처리할 의지도 없었다. 프로젝트는 완전히 중단되었고, 재개될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주변의 동료들과 이 회사에 오래 근무한 동료들조차 부정적인 예견만 내놓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아예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지금의 회사는 사내 동아리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어릴 적 어깨너머로 배운 드럼과 학생 시절 활동했던 밴드 경험을 되살려 사내 밴드 동아리에서 미친 듯이 활동했다. 이전까지는 합주팀 하나 정도만 참여하여 가볍게 동아리 활동을 했지만, 이 시기에는 합주 팀을 3개인가 4개까지 늘려가면서 1주일에 3~4회씩 사람들과 합주를 진행했다. 당연히 공연 횟수도 늘어서 정기 공연 2회, 이벤트 공연, 지역 락 페스티벌, 정자역 버스킹 등 참여할 수 있는 건 다 참여했다. (합주와 공연을 위해서는 꽤나 많은 개인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에 한 번도 쳐보지 않은 새로운 악기 일렉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더욱 적극적으로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여 MT를 기획하여 추진하기도 했다. MBTI 성향이 외향성(E)이었기 때문일까. 내가 현실적으로 닥친 문제들은 전부 외면한채 사람들과 그저 부대끼면서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했던 것 같다.
그렇게 4월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반쯤 뮤지션으로 살면서 지나갔고, 5월이 되었다. 하지만 5월 초까지도 여전히 상황은 그 어떤 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직속 리더는 나에게 무언가 업무 진행을 요구했지만,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 업무는 지지부진했다. 결국 프로젝트는 엎어졌는데, 이 업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멤돌았고, 본업을 등진채 바깥을 멤돌았다. 결국 보다 못한 직속 리더가 내게 면담을 요청했고, 나는 이 조직에 남아서 뭔가를 노력하거나 시도해 볼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리더가 너무 가혹한 게 아니냐 할 수 있지만, 내게는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주요 요인은 뒤쳐짐에 대한 불안감 혹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호승심과 투쟁심 같은 것들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 조직에 내가 없어도 된다"와 같은 말인데, 오히려 이런 얘기를 듣고 불타올랐던 것 같다. 다만 불태우려면 뭔가 땔감이 있어야 하는데, 프로젝트가 중단된 상태에서 땔감으로 쓸 장작이 없었다.
불타오르려 했지만 태울 것이 없었기에, 생각을 정리하고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기 위해 당장 2주간 리프레시 휴가를 쓰겠다고 면담 중에 선언했다. (지금의 회사는 3년에 한 번씩 15일의 리프레시 휴가를 준다. 대부분 해외여행이나 긴 휴가로 사용한다.) 아무 계획 없이 쓴 2주 휴가였고, 매일매일 합주 혹은 회사 부근 저녁 약속이 있었기에 어딘가로 떠날 수도 없었다. 단지 애매하게 일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는 이도저도 안될 것 같아서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휴가 첫 주간,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백업 플랜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휴가 중에도 2, 3일은 회사에 들러 상위 리더와 면담을 진행하거나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 당시 회사 전체적으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였기에,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첫 주간의 노력들은 별다른 의미 없었다.
휴가 둘째 주간. 여러 생각이 들었던 일출. 혼자 떠난 강릉에서.
하지만 휴가의 둘째 주간에는 "아씨,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딱 이 마음이었다. 뭔가를 하려 하지 않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예정된 저녁 약속이나 일정을 진행했고, 하고 싶었던 것들 하고, 멍 때리거나 뜬금없이 강릉으로 혼자 2박 3일 다녀오는 대문자 P 행동을 저질렀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내가 들고 있던 욕심과 불안을 하나씩 내려놓으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정리되었다.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하니,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그나마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2주간의 리프레시 휴가 마지막 날, 마치 누군가 짠 것처럼 중단되었던 프로젝트가 다시 재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과적으로는 프로젝트는 다시 시작되었고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앞선 과정에서 스스로를 비우고 나니 오히려 일을 함에 있어 머리가 맑아졌다. 한 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먼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보다 방향성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 첫 해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고, 그다음 해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예민해져 동료들과의 갈등이 많았다. 올해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쌓였지만, 그것들을 내려놓으니 여유가 생겼고, 주변과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잠깐 옛날 얘기를 하자면, 복잡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이 강박은 줄어들더라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뭔가를 이루고, 더 나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그래서 내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했고, 때로는 업무를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 공격적이거나 날카롭게 대했던 적도 있다. 이러한 강박으로 인해 생기지 못했던 여유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니 생기더라. 일을 잘 해내고 싶었던 욕심,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었던 욕망, 존재감과 영향력을 가지려 했던 집착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주변을 더 잘 돌아보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돌이켜보면 감사할 것이 참 많다. 그동안 감사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내 삶의 좌우명 중 하나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지 못했다면, 여전히 예민하고 날카로운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늘 그랬듯이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이고, 언젠가 이번일 보다 더 큰 혼란이 닥치겠지만 이젠 다른 의미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최고의 복지는 동료라고 했던가. 최근 가장 감사함을 느끼는 부분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다. 회사가 크고 사람이 많은 만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내가 겪었던 사람들은 모두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이다. 가장 최근의 면담에서, 현재 팀에서 직속 리더를 제외하면 내 연차가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짬을 똥꾸멍으로 처먹은 거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의 모두가 그리고 함께 협업하는 분들을 보면 나보다 나은 점이 훨씬 많다. 기술적 역량, 적극성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포함한 소프트 스킬, 집중력, 근성, 인사이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능력 등. 다들 나보다 나은 점들이 많아서 본받거나 혹은 베껴야(?)할 점들이 앞으로 많다. 내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이런 동료들이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낀다.
사소하지만 아침에 제때 눈을 뜨고, 크게 아픈 곳 없고, 비록 혼자 살지만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잘 살고 있고, 일을 함으로써 조직이나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으며, (한번 중단되었지만) 하던 일이 멀쩡히 잘 굴러가고 있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다는 것 등등 역시 모두 감사할 일이다.
최근의 나는 여유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고, 최대한 스스로를 자가 검열하려 한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한번 더 살피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돌파할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항상 주변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물론 대놓고 이런 부끄러운 마음을 티 내지는 않는다. 원래 성격이 좀 뭐같다) 여전히 그리고 때때로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억양이 세게 나갈 때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내 행동을 돌아보고 마음을 다잡으려 한다.
부디 이 생각과 감정이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지금 내가 이곳에 있으며, 뭔가를 할 수 있고, 어딘가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