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적부터 물을 좋아했다. 아주 어렸을 때 체육센터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수영 수업날 엄마가 참관을 왔다. 자유영을 배우던 날이었는데 나는 한 동작이 끝날 때마다 엄마를 찾았다. 그 때마다 엄마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몇번을 멈추어 섰는지 모르겠다. 50미터 남짓의 짧은 레일에는, 삐뚤빼뚤 서투르게 헤엄쳐왔던 나의 궤적과 멈춰선 구간마다 젊은 엄마의 설익은 미소가 엮어준 매듭이 촘촘히 가득차 있었다. 그 때부터 물은 나에게 사랑이 되었다.
올 여름 바다에 자주 갔다. 동해 바다, 서해 바다, 남해 바다에 갔다. 같은 바다지만 모두 달랐다. 바다의 모양과 색깔과 향기 같은 것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무조건 날렵하고 우렁찬 동해 바다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서해 바다의 남루함이나 남해 바다의 점잖음이 마음을 울린다. 사실 바다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같은 물이 다른 형태를 띄는 것 뿐이다. 바다의 표정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바다에서 서핑을 하고, 수영을 하고, 스쿠버 다이빙을 했다. 서핑은 바다의 피부를 쓰다듬는 것 같다. 서핑 보드에 앉아 육지의 반대편을 바라보며 파도를 기다리다 보면 바다의 피부의 결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탐스럽다. 기다리는 마음은 나에게 겸손함과 경건함을 알려준다. 바다의 피부에 반쯤 잠겨 수영을 하다 보면, 바다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상상을 하면 바다의 배를 내가 가르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폭력이다. 미안하면서 고마운 마음은 나를 결박시킨 채 떨리게 한다. 다이빙 장비를 메고 바다 깊숙히 가라앉아 본다. 나는 이제 바다의 목구멍과 식도를 지나 위장 속에 있다. 바다의 뱃속은 아름답다. 빈틈없이 나를 포옹하는 물은 엄마의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엄마의 뱃속에서 왔고 바다에서 왔다.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라>를 봤다. 너무 좋아서 영화관에서 한 번 더 봤다. 좋아하는 사람과 한 번, 혼자서 한 번. 기쁨과 슬픔과 그 사이의 수많은 감정들이 버무려진 오색 돌같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현기증이 나서 내장이 뒤흔들리는 기분이었지만 고마웠다. 도요새, 검은머리물떼새, 쇠제비갈매기, 저어새, 흰발농게, 그리고 그 모든 생물들이 살아가는 수라 갯벌, 새벽녘 갯벌에 잠시 내려앉았다 떠나가는 붉은 달과, 새들과 벌레들과 바다가 숨을 쉬는 소리들.
2006 년, 새만금 간척지 사업을 반대하는 종교인들의 3보 1배 시위가 65일 동안 진행됐다고 한다. 전북 부안군부터 서울까지, 승려와 신부와 목사가 한 사람이 되어 3걸음에 1번씩 절을 하며 걸었다. 절을 하다가 신부님이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져서 오열을 했다. 그의 울부짖음이 마치 자연이 내는 소리 같았다. 새만금 간척지 사업을 반대하던 해녀 '류기화'씨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그녀의 죽음이 내가 아무렇지 않게 꺾었던 풀의 모가지 같았다. 뉴질랜드에서 날아온 마오리족이, 그들이 신성시 여기는 도요새들의 고향인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을 함께 아파하고 규탄하는 장면을 보았다. 호주에 1년 동안 살았던 당시, 뉴질랜드 친구들을 사귀었을 때 그들을 키위라고 장난스레 불렀던 기억이 불현듯 났다.
새만금 생태조사단 단장인 '동필'씨가 모아온 조개껍질들과 수많은 새와 갯벌의 사진들이 펼쳐졌다. 수라 갯벌은 그 모든 생명체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수라 갯벌이 있는 군산은, 밥벌이로 목수 일을 하고 있는 동필씨의 삶의 터전이었다. 긴 부리를 가진 도요새가 갯벌에 부리를 꽂고 먹이를 찾는 광경과 동필씨가 나무 합판에 전동 드릴로 못을 박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부리가 갯벌에 못을 박는 장면에 드릴 소리가 덧씌워지자 글과 말로 놓칠 뻔 했던 진실, 갯벌은 도요새의 밥벌이 터전이자 우리의 서울이자 내가 매일 밤 몸을 누이는 이 원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섬광처럼 번쩍 느끼게 해 주었다. 해야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동필씨가 말했다. 아름다운 것을 본 것도 죄가 될 수 있냐고. 자신은 아름다운 것을 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 같다고. 옥구 염전에서 그가 보았던 도요새의 군무를 나도 보고 싶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두려움이 나를 더 크게 짓눌렀다. 수천 수만장의 사진을 남기고 아직도 진행중인 새만금 간척지 사업을 반대하기 위해 소송을 걸고 그의 아들인 '승준'은 생물학도가 되어 법정 보호종을 찾기 위해 갯벌로 나선다. 1991년부터 시작해서 2006년 물막이 공사로 인해 끝났다고 생각했던 새만금 간척지 사업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 물막이 공사로 인해 간척지 내 고인 바닷물은 사해가 되어 버렸다. 새와 물고기 시체와 썩은내가 진동하는 곳. 2020년, 조사단과 시민들의 끝없는 문제 제기로 인해 하루 2번 수문을 열고 신선한 바닷물을 들여온다고 했다. 어릴적 교과서에서나 봤던 새만금 간척지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희미해서 이미 빛이 바랬었는데 동필씨와 승준씨와 수많은 조사단 단원들은 바래지 않고 오히려 새파랗게 숨이 막히도록 살아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던 걸까?
수라 갯벌에 가보고 싶었다. 감독은 말했다. 수라 갯벌에 한 번이라도 와 본다면, 새만금이 이미 죽은 갯벌이라는 소리를 함부로 하지 못할 거라고. 부채감을 덜기 위해서란것을 알면서도, 행동을 위한 행동이란 것을 알면서도, 허영과 허세로 인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냥 무작정 새만금으로 향했다. 부안군은 꽤 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함께 동행해주어 운전을 하는 내내 무거운 고마움과 부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가벼운 어리석음으로 그것들을 애써 덜어냈다. 무작정 수라 갯벌과 옥구 염전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더 깊은 진심을 담았더라면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고 갔을텐데, 하는 죄책감이 마음을 괴롭혔다. 유럽 여행 관광객들이 랜드마크에 방문하고 사진 한 방 찍고 돌아가는 것과 다른게 무엇일까? 하는 마음에 괴로웠다.
그래도 직접 와 본 새만금 갯벌은 화면에서만 본 것과 다르긴 달랐다. 새가 이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염습지에 자라 있는 붉은색과 녹색 해초들과 옆으로 종종걸음을 걷는 아기 게가 아름다웠다. 직접 갯벌과 염습지를 밟아 보았다. 저 멀리 갯벌에 우뚝 서서 쉬고 있는 새들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엔 더 많은 새들을 보았다. 새들의 걸음걸이나 먹이 먹는 모습을 보면 종마다 그리고 개체마다 같은 새가 하나도 없다고 했던 동필씨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많은 아이들이 모여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이어도 아들 승준씨의 달리는 모습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던 그의 말과 그 말을 하던 미소와 함께. 갯벌을 따라 겅중겅중 달리는 새끼 고라니를 보고 마음이 참 앙증맞아졌다. 여기 오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깊이 좋아해봤던 남자친구의 친구가 서산 근처 <버드랜드>라는 곳에서 새를 지키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어 함께 방문했던 기억이 났다. 그 친구도 새가 좋아서 멸종 위기종을 보호하고 싶어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한강 작가가 소설에서 새의 죽음을 묘사했던 장면과, 그의 다른 소설에서 나무가 되었던 여자가 떠올랐다. 모두 다른 기억들인데 마치 형태가 다른 조각들을 이어 붙여서 알 수 없는 형태의 조각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 같은 것 같았다.
곁을 지켜준 이에게 참 고마웠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치기어린 어리석은 여행이었지만 군말없이 견뎌준 그 사람이 참 고마웠다. 오가는 길 휴게소에서 잼버리 축제에 참가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 때에는 잼버리 축제가 이렇게 큰 이슈가 될 줄 몰랐다. 그냥 지역의 조그만 행사겠거니 하며 지나쳤다. 새만금 간척지 사업과 잼버리 축제가 이렇게 깊게 연루되어 있을줄 몰랐다. 본래 세계 잼버리 축제 후보지는 새만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의 힘 측에서 그들이 추진해왔던 과거의 잘못을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새만금으로 강행했던 것이었다. 농지 부족으로 간척했던 새만금이 농지로도 그 어떤 용도로도 사용이 어렵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잼버리 대회의 참상과 대한민국 정부와 윤석열 대통령의 대처 방식을 보며 화가 났다. 화가 나는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새만금에서 보았던 새가, 고라니가, 바다가 맑은 눈을 한 채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너는 화를 낼 자격이 있니?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이슈가 터졌다. 나는 축산업계에서 근무하고 있고 우리의 영업 대상 중에는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대전에 있는 한 양어사료업체에서 발주가 더디게 들어왔다. 우리는 그런 업체에다 다음번 생산 포케스트를 달라고 재촉하는 전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회사에서는 프리믹스 볼륨이 떨어진다고 압박하고, 이렇게 물량이 적어지다가는 평택에 있는 한국 공장의 존폐 여부가 흔들릴수도 있다고 한다. 마진이 높은채로 값싼 경쟁사와 경쟁하라는 요구가 말이 안되는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군말없이 사장과 본사의 지시에 수그린다. "만약 계속해서 물량이 떨어지면 공장 사람들 몇 자르고 안되면 공장 없애고 OEM 돌리면 되죠" 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사장 새끼의 면상에 주먹을 박아주고 싶다. 20년이 넘게 그 공장에서 일해온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 정부에 머리를 조아리는 윤석열 정부의 기조와 맞추어, 우리 회사내의 위계 구조도 미묘하게 영향을 받는다. 우리 회사는 다국적 기업이라 덩치 큰 기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리적 위치에 따라 작은 유닛으로 쪼개 관리를 한다. 최근 한국이 속한 오퍼레이팅 유닛이 한국, 일본, 대만으로 재편성되고 그 수장으로 6명 중에 5명이 일본인으로 교체되었다. 그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싶은 말을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형편없고 비루한 내 자존감과 함께 삼켜 넘긴다. 우리가 앞으로 먹게 될, 우리의 다음 세대가 앞으로 더 많이 먹고 마시게 될, 오염수와 함께 뱃속으로 삼켜 넘긴다.
회사에서는 지속가능한 축산을 외친다. 이번 제주에서 개최했던 세미나도 Sustainability가 주제였다. 소의 메탄가스가 온실가스에 차지하는 비중이 14.5% 된다고 한다. 그 메탄가스를 저감하기 위한 신제품을 우리 회사에서 개발했다. 빌게이츠까지도 우리 회사 제품을 언급했을 정도로 주목받는 제품이라고 했고 그 제품의 한국 내에서 등록 및 마케팅하는 프로젝트를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사료를 생산하고 농장을 경영했을 때 탄소 발자국과 오염물질이 얼마나 배출되는지 수치화 해주는 플랫폼을 런칭하는 신규 프로젝트도 있다. 회사 내에서는 여전히 생산 실적과 돈과 효율을 이야기 하면서 친환경과 지속 가능성을 논하는 이 상황이 참 서글펐다. 윤석열과 한국 정부에 화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데에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 아니, 오히려 그들의 악행에 가담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치가 떨리게 부끄러워서였다. 그러나 부끄럽지만 부끄러움에 그치고 마는 나의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주에 다시 제주도에 간다. 내가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던 그 바다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집회가 종종 열렸다. 나는 이제 아름다움을 보고 싶지 않다. 아름다움을 본 죄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으니까. 혁명은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한 몸부림이다. 승려가 나무에 주었던 물은 핏물이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