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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니 Mar 17. 2017

더 킹 (2017)

욕심의 딜레마


요즘 유행이나 사회 이슈, 물리적 시간과 전혀 무관한, 오직 의식의 흐름으로 달려가는 글글 라이프.

막 내린 영화지만 나는 꿋꿋하게 리뷰를 쓸 거다.

세상은 날 더디다고 비웃어~ #윤종신세로



더 킹 (2017)
감독 : 한재림
주연 : 조인성(박태수 역), 정우성(한강식 역),
류준열(최두일 역), 배성우(양동철 역)


사람에겐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생기는 욕심이 있다. 누군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을 때가 있다. 쉬워 보이는 사람은 내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을 때가 있다. 나를 남에게 과시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남을 불리하게 만드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더 쉬울 수도 있다.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형은 동생을 때리기도 한다. 만만해 보이는 친구를 휘두르고 싶은 마음에, 왕따를 놓기도 한다. 왕따를 휘두르는 주동자가 되어 반 친구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기도 한다.
 
더 킹에서는 이러한 관계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의 약점을 잡는 일이 규모가 커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정치검사라는 소재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역사는 힘의 논리에서 우위를 점한 자가 만들어간다. 그 승자가 되기 위한 방법이 바로 남의 약점을 잡는 것이다.

사건도 김치처럼 잘 묵혔다가, 익었을 때 꺼내서 먹어야 돼.



주인공 박태수가 추진하던 사건을 덮자며 나타나 전략부 사무실을 보여주는 선배검사 양동철의 말에서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할 법이 누군가의 약점을 잡기에 너무나도 유리한 도구라는 것이었다.
결국 전 국회의원 아들의 성폭행 사건을 덮고 양동철의 추천으로 전략부로 임지를 옮긴 그는 한강식이라는 살아있는 권력을 만나게 된다.


그냥 권력 옆에 있어,



호랑이를 잡는 사냥꾼의 눈을 하는 한강식에 압도된 태수는 전략부에 있으면서 자신이 역사라고 말하는 그의 권력이 어떻게 만들어져 온 건지 서서히 알아갔다.

검찰이 정권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권력이 될 수 있었던 건, 마치 먹잇감 앞에 당장은 발톱을 감추고 도움을 가장한 사자처럼 약점들을 묵히고 있다가 적절한 때 언론에 넘겨 국면을 만들어 온 설계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검사들 중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검사는, 맡은 바에 충실한 자가 아니라 설계된 무대 위의 사건을 맡으며 주연배우 역할을 꿰차는 자에게 있었다. 그 이목의 중심에 비리의 온상인 한강식이 있었던 것이었다.

왜 정의는 승리하지 못하는가.


정의는 그것만으로 이유요 명분인데 어째서 승리는 추악한 박쥐와 거짓말꾼들에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뜨거운 탄식에 냉담한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사람은 옳고 그름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원하고 원하지 않음에 따라 움직이기 더 쉽다. 가치보다는 욕심에 따르기 쉽다. 누구나 정의로운게 옳고 추구해 마땅한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것보다 더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포기하기는 너무 쉬운 것이다. 권력은 가치에 의해 세워져야 마땅하지만 욕심에 의해 취해진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권력의 민낯이 있다.


한강식이 원하는 것은 권력을 계속해서 쥐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당선 되는 쪽에 밑밥을 깔아두어야만 했다. 그러나 누가 당선이 될지는 그 날이 될때까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한강식의 추잡하고 한심한 속내를 드러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는 무속인을 찾아가 누가 당선이 될지를 알려달라며 굿판에 돈을 끼얹는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하겠다는 거다. 여기까지 온 사람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건지 자신이 원하는 것에 휘둘리며 사는 건지 헷갈리게 된다. 누군가를 휘두르려고 권력을 가지고자 했던 건데, 이제는 자기 욕심에 자기가 휘둘리게 된 것이다.

어느정도의 욕심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이르면 욕심은 자신을 잡아먹고 만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 욕심 자체가 발톱을 감춘 사자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한강식은 위기에 처하자 태수를 버리고, 결국 말미에 태수의 고발을 통해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런데 검찰 조사실에 검사가 아닌 피의자 신분으로 들어가서도 그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며 우매하기 짝이 없는 제 자신의 굴레에서 허우적대는 것이다.


왜 정의가 승리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그 승리가 진정한 승리인가? 

라는 물음으로 말이다.


지금 당장은 욕심쟁이들이 승리를 가져간 듯하나 이미 그들은 욕심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영원한 승자가 되지 못한다.
비록 정의가 승리하는 길이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릴지 모르나, 만약 정의가 승리한다면 그것은 욕심보다 정의를 택한 사람들의 승리일 것이다. 원하는 것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위해 원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승리인 것이다.
 아마 이것이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승리가 아닐까.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승리를 얻을 때 더욱 자유롭고 멋진 인간이 될 수 있다. 자유로운 왕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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