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별회를 다녀오다

5년 전, 타 군으로 발령이 나면서 내 삶의 동선도 바뀌었다. 처음 3년은 학교 관사에서 지냈고, 이후 2년은 왕복 두 시간 거리의 출퇴근을 감당했다. 특히 마지막 학교에서 보낸 1년은 유난히 길고 무겁게 느껴졌다. 아침마다 몸을 일으켜 세우는 일부터가 고역이었고, 퇴근길에 들어서면 온몸이 축 처진 채 겨우 운전대를 붙잡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지쳐 가면서도 이상하게 이 학교를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을 비롯해 이곳에서 만난 분들은 한결같이 친절했고 정이 많았다. 그 따뜻함이 내게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던 모양이다.


관외 내신을 쓰면서 마음은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발령이 나기를 바라면서도, 차라리 1년쯤 더 이곳에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번갈아 들었다. 겨울방학이 깊어 갈수록 내 마음은 조금씩 발령을 바라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집에 혼자 있는 막내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그 저울추를 움직였을 것이다.


젊었을 때의 나는 삶이 늘 내 뜻대로 흘러갈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두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막내인 셋째를 가졌다. 공기업에 다니던 남편 역시 삶이 언제나 안정적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암흑기를 맞이했고, 뜻하지 않은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그 시기에 겪은 친정어머니의 죽음은 내게 가장 큰 상실이었다. 모든 것이 어긋나 있던 그때, 낯선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의 기분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나는 교사이기 전에 연약한 인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맡은 업무와 책무가 먼저다. 개인적인 감정은 늘 뒤로 밀려나고, 슬픔과 고통을 드러낼수록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조직 안에서 개인은 언제나 ‘조직원’으로서의 모습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으며 지냈다. 그 시간 동안 내 힘듦을 편히 털어놓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만난 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는 꽁꽁 감싸두었던 내 상처에도 닿았는지, 점점 딱지가 앉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텃밭에서 난 채소로 주스를 만들어 주시던 과학 선생님, 업무가 힘들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던 선생님들, 민원과 학생 문제를 함께 고민해 주시던 교장·교감 선생님, 늘 넉넉한 마음으로 음식을 퍼 주시던 급식 선생님들, 건강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해 주시던 보건 선생님,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든든히 뒷받침해 주신 행정실 직원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나를 조금씩 회복시켜 주었다.


저녁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한 분 한 분께 그동안의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말하다 보니 결국 눈물이 쏟아졌다. 그 눈물에는 이곳과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과 다시 언제 이런 정을 나눌 수 있을까 하는 미안함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송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전히 한 시간 남짓 밤 운전을 해야 했다. 고속도로로 들어서기 전 30분 동안 이어지는 깜깜한 길이 유난히 두려웠다. 출퇴근 때는 훤한 시간이라 괜찮았지만, 오늘은 보이는 것이 온통 어둠뿐이었다. 어디선가 고라니 같은 야생 동물이 튀어나올 것 같아 긴장이 더 깊어졌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지난 5년의 시간을 잘 내려놓고 왔다고 생각하니, 운전대 위의 손에도 조금씩 힘이 빠졌다.


다사다난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힘들었지만 그분들과 함께하며 위로를 받았으니, 그 시절 또한 내게는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어느새 어둡기만 하던 길을 지나 톨게이트를 통과했고, 차는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도로 옆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이 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마치 지난 5년이 그렇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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