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하루
날씨가 좋았다. 며칠 전 우연히 보게 된 벌교 나들이 블로그에 찍힌 사진 한 장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나 보다. 가슴 두근거리게 만든 날씨를 핑계 삼아 남편에게 가까운 벌교에 콧바람이나 쐬러 다녀오자고 졸랐다.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남편이 이런 나를 보고 징그럽다고 한다. 징그럽다는 말을 사랑스럽다는 뜻으로 자의적 필터링을 거친 나는 거울 앞에서 대충 썬 크림을 바르고 플리스를 걸쳤다.
출발한 지 20분 정도 지나 주차장에 도착했다. 봄이 이제 온 건가! 싶을 정도로 따뜻한 바람이 볼을 스쳤다. 벽화가 그려진 여러 담벼락을 지나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앞에 멈췄다. 날것 그대로의 담벼락에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며 시를 써가는 이의 모습이 환영처럼 지나갔다. 그의 수고로움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감동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이토록 온몸으로 울려 퍼지는 울림을 선사해 준 이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했다.
골목을 내려와 문학의 거리로 향했다. 주변 건물들과 다르게 외관이 목조로 된 문구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름도 ‘개구리 문구점’이라 어린아이처럼 무엇을 파는지 궁금했다. 생각보다 다양한 상품들이 많았다. 주인께는 양해를 구해 사진 한 컷 찍고 볼펜 한 자루를 구입해 나왔다.
문구점을 나와 직진하다 보니 보성여관 간판이 있는 목조 건물이 보였다. 조정래 작가님이 쓴 태백산맥 속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보성여관은 1930년대에 지어져 지금까지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오고 있다고 했다. 당시 지리적으로 벌교가 교통의 요지로 부상하던 때라 여관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여관 입구를 들어서니 오른쪽에 카페가 있어 차를 시켰고 남편과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바깥 풍경을 잠시 감상했다.
차를 마신 후 본격적으로 여관 탐방에 나섰다. 좁은 복도를 통과하니 네모 모양의 지붕 아래 한가운데 정원이 보였다. 어릴 때 살던 한옥이 생각났다. 비슷한 구조였지만 마당 한가운데수돗가와 우물이 있었는데 이곳은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목련꽃 겨울눈이 하늘을 수놓고 있어 겨우내 꽃 피울 준비를 이제 막 마친 것 같았다.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풍경과 마루를 보고 있으니, 어릴 적 마루에 누워 처마 끝 제비집을 넋 놓고 바라보던 때가 떠올랐다. 조그만 새끼 제비들이 세모 입을 벌려 소리를 내지르면 어디선가 어미 새가 날아와 입으로 먹이를 넣어주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천천히 둘러보면서 드문드문 기억나는 옛 한옥이 겹치면서 어린 내가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추억이 된 그 시절 어른들의 분주한 모습도 보였다. 살짝 코끝이 시큰했다.
2층으로 뻗은 계단을 오르며 오른쪽으로 난 창밖 풍경에 잠시 서 있었다. 지붕과 사이로 보이는 정원, 하늘과 햇빛 모든 것이 충만했다.
날이 좋아 떠 올렸던 누군가의 블로그 사진으로 시작된 여행으로 2월은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남편과 따뜻한 차를 마시며 기쁨으로 충만된 공간이 잊고 살았던 유년 시절을 만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