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이 책의 원제는 엘리자베스 핀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원제를 그냥 제목으로 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강의 이름이 '문화와 문명'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겠죠.
하지만 불안해하지 마세요.
여러분한테 원그래프를 마구 던지지는 않을 거니까.
여러분 머리를 이런저런 사실로
꽉 채우려 하지도 않을 거예요.
거위 배 속에 사료를 채우듯이.
그래봐야 간만 부어올라 건강에 나쁘겠죠."
p.11
강의 첫날,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를 보고 닐은 막연하나마 '내 평생 이번 한 번만큼은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생각합니다. 핀치 교수와의 만남이 자신의 삶에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는 걸 예감합니다.
소설 줄거리
1부는 닐이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의 강의에 참여하면서 그녀의 가르침에 사로잡히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핀치 교수는 단순한 교육자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하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녀의 가르침은 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닐은 개인적 어려움(이혼, 혼외자, 경제적 곤란 등)으로 인해 그녀의 과제를 완수하지 못하며 미안해합니다. 그러나 핀치 교수는 닐의 부족함을 질책하지 않고, 대신 그것이 "일시적일 것"이라며 조용히 격려합니다. 이후 닐과 핀치 교수는 20년에 걸쳐 제한된 시간이지만 의미 깊은 만남을 이어갑니다.
2부는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배교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율리아누스는 핀치 교수가 중요하게 여겼던 역사적 인물로, 닐이 핀치 교수가 사후 자신에게 남긴 공책과 서적으로 그의 철학과 신념을 심도 있게 탐구합니다.
3부는 닐이 에세이를 마치고 핀치 교수의 오빠와 대화를 나누면서 핀치 교수의 또 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새롭게 알게 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또 그녀가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떠올리며 그는 핀치 교수의 삶을 순교적인 과정으로 보게 됩니다. 그녀의 주변인들을 만나면서 그녀를 재해석하고 동시에 그녀가 자신에게 심어준 철학적 가치를 더욱 깊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본다.
뭐,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p.288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알고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기억에 의존하는 나의 정체성도 유동적입니다.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가끔 삶에서 내가 기억하기 싫은 상처를 완전히 지우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나의 역사란 결국 이 소설에서 말하는 우연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닐이 엘리자베스 핀치를 만나는 순간 자체가 단순히 계획된 일이 아니라, 인생의 한 우연한 지점에서 생긴 중대한 전환점으로 보이듯이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선택하는 "나의 역사"와도 깊이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삶의 본질적인 불확실성과 사건의 연속성이 우연을 통해 드러나고, 결국 우리는 그 우연들을 재구성하고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닐이 핀치 교수가 남긴 과제를 완수하려는 과정 역시, 그의 삶 속에서 우연히 주어진 책임이지만, 그것을 통해 닐은 자신의 내면적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닐은 자신이 알고 있던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의 모습과 다른 사람들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된 모습을 유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거짓 순진이라 부르는 조제된 또는 인위적인 단순성을 이용하여 세상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핀치 교수는 거짓되지도 순진하지도 않은 스펙트럼에서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나의 기억-기억도 결국은
상상력의 기능 가운데 하나다-은
수사학의 비유와 같고
과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살아있는 비유지만,
어쨌든 비유,
아마도 내가 엘리자베스 핀치를 '알고' 또
'이해하는'것은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고'
또 '이해하는'것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깨달았으니, 멈출 때가 되었다.
p.290
닐은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와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해 '안다'라고 말하지만, 그 '앎'이 사실적이고 절대적인 이해가 아니라는 사실도 동시에 자각하게 됩니다.
닐은 엘리자베스 핀치를 자신의 스승으로 깊이 존경하면서도, 자신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며, 그녀에 대한 앎이 율리아누스를 이해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멈출 때가 되었다"는 말은 닐이 자기 자신과 핀치 교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이제는 자신만의 결론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닐은 자신의 에세이를 그대로 서랍에 넣어둡니다. 운이, 우연이 자기 뜻대로 하게 놓아두도록 말이죠. 누군가 그 에세이를 발견한다면 그 운으로 인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겠지만......
이건 정당할 것이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이 일은 지금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고
따라서 내가 자유와 행복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p.292~293
제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게 된 순간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우연이었다 해도 나를 비켜가지 않아 이 순간만큼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선택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우연의 어우러짐이 결국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