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16. 러블리 우중산행과 돼지갈비의 비밀
벌써 지난달의 일이다.
아버지와 언니 이렇게 셋이서 관악산 둘레길을 5시간에 걸쳐 걸었다. 아버지와는 종종 걷지만 언니와는 거의 30년 만에 같이 걷게 되었다. 이직한 곳에서 불합리한 처우에 분개해서 퇴직을 했기 때문(나중에 에세이에 쓸 일이 생길 것 같다. 사회적 경제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에 평일의 여유를 즐기게 되었다.
아침 일찍 영등포 친정으로 가서 아버지와 언니와 조인한 후 함께 석수역으로 출발하면서 여정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3인 산행에 살짝 들뜬듯한 언니는 몇 가지 여름 아이템을 챙겨 왔다. 시원한 COOL 팔토시부터 꽁꽁 얼린 아이스 목걸이(?) 등.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지하철역에서 김밥도 사고 음료도 사고 얼음 목걸이도 나눠 끼는 등의 약간의 부산함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1호선 신길역에서 석수역까지는 20여분 정도로 먼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금방 도착해서 역사를 빠져나간다. - 요즘 아버지가 즐겨 보시는 유뷰브 채널은 근교에 가볼 만한 산성, 둘레길 등을 안내하는 채널인데 미리 공부하고 오라고 공유도 해주셔서 사전에 코스를 잘 숙지하고 왔다. 그랬더니 영상에서 보던 그 출구가 바로 딱 보인다. - '내가 길을 잘 아니까 나만 따라와'라는 기운을 폴폴 풍기면서 앞장서 나간다. 초행길이면서... 뒤에서 아버지와 언니가 웃는 게 느껴지지만 모르쇠 전법?으로 밀어붙인다.
이 날 걷기로 한 코스는 호암산, 삼성산, 관악산 이렇게 3개의 산을 모두 경험하는 코스이다. - 또한 여기는 서울 둘레길 5-2코스와도 거의 일치한다. -
역사에서 빠져나와 5분도 채 안 걸었는데 바로 호암산 숲 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 정말 요즘에는 자연을 즐기기로 마음만 먹으면 못 갈 곳이 없는 것 같다. 암튼 당분간은 서울 둘레길의 주황색 리본만 잘 따라가도 된다.
너무도 뜨거웠던 날이라서 지치지 않게 쉬엄쉬엄 올라가는데도 연신 땀이 흘러내린다. 그런데 이 날씨에... 한 어르신이 휴대폰을 놓고 오셨다고 석수역까지 거의 내려가셨다가 다시 올라오시길래 허걱하며 휴대폰 빌려 드려서 상황을 파악하실 수 있도록 도와 드렸다. 다행히 어느 분이 발견해서 휴대폰을 석수역 인근에 맡겨 놓았단다. 어르신이 너무 힘들어하시면서 손을 덜덜 떠신다. 안 되겠다 싶어 잠시 곁에 함께 앉아 찬물과 과일을 좀 나누어 먹었다. 의도치 않게 넘 이른 타임에 한 번의 휴식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 가시는 어르신을 보며 다행이다 싶었다.
처음에는 산길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아버지와 언니는 좀 힘들어하는 것 같다. 특히 언니는 정말이지 30년 만의 산행이다 보니 '좋기는 한데 넘 힘들다.'를 연발한다. 언니의 보폭에 맞춰 속도를 좀 더 조절하며 불로천 약수터를 지나 호압사 산책길로 계속 올라간다. (호압사는 무학대사께서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게 위해서 세운 사찰이라고 한다.)
호암 늘솔길 방향으로 진입하면 데크길이 이어진다. 데크길로 접어 드니 언니는 조금 살만하다고 한다. 거기서 잠시 앉아 물과 김밥을 또 조금 먹고 쉬었다. 증간 중간마다 의자 등을 잘 비치해 놓아서 무장애길의 기능을 잘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데크길을 한참 걷다 보면 잣나무 숲도 나오고 인공폭포도 만나게 되는데 잣나무 숲의 규모는 매우 크고 폭포의 규모는 아주 작은 미니 미니이다. 그래도 나름의 볼거리들을 찾아 사진도 한 장씩 찍으며 가다 보면 다시 산길이 나오고 '호압사'로 접어든다. 여기서 시원한 커피를 한 잔씩 마시는데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직 삼성산과 관악산을 가야 하는데 비가 많이 쏟아지지 않기를 바라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호압사 뒤로 내려오면 거기서부터 도란도란 오솔길이 펼쳐진다. 아버지와 언니 이렇게 셋이며 서로 '도' '란' '도' '란' 이렇게 한 마디씩 말해가며 즐겁게 산길을 내려온다. 아버지가 특히 즐거워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언니도 나도 기분이 더욱 좋아진다. 이제 곧 천주교의 성지이기도 한 삼성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성지를 지나고 성지 아래의 약수터를 지나면 이제 드디어 익숙한 관악산이다.
관악산에 들어 서니 아버지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는 것 같다. 젊으실 때 관악산은 아버지의 놀이터였다는데 그래서인지 곳곳이 매우 익숙하다고 하신다. 여기서부터 비가 조금씩 굵어진다. 챙겨간 우비를 입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면서 발걸음을 빨리 옮긴다. 서울대 방향 그리고 보덕사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연주대 전망대까지 왔다. 연주대 전망대는 말 그대로 연주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 연주대가 아님 - 그러다 보니 그 기대와 다른 모습에 살짝 헛웃음을 짓기도 했지만 비가 굵어지기 시작하는 터라 서둘러 내려간다.
연주대 전망대라는 마당바위에 올라서서 잠시 비 내리는 하늘 한 장 찍어 주고 장승배기길로 내려온다. 여기는 온갖 종류의 장승이 모두 계신다. 그래서인지 내려오는 길이 약간 신령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
이제는 진짜 마지막 끝지점에 거의 다 왔다. 관악산공원 정문까지 내려오는데 이제는 거의 비가 퍼붓는 지경이다. 하지만 하산을 하여 아스팔트길을 걸어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오히려 운치가 있어 좋다며 아버지와 언니와 나는 연신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른다. 관악산공원 앞의 주점에 들러서 막걸리를 한 잔 하려고 했지만 지역에 큰 상가가 생기는 듯 리모델링 중이라 우리는 미련 없이 대방역으로 바로 고고~
대방역도 비는 양동이로 퍼붓는 중이다. 원래 산행이 끝나면 어머니가 집에서 맛있는 백숙을 해 놓고 기다리겠으니 바로 조속 귀가하라 하셨는데 ~ 가는 길에 돼지갈빗집 냄새가 너무 좋다. 우리 셋은 그럼 딱 한잔씩만 하고 가자고 작당하여 돼지갈비 3인분과 빨간 모자 참이슬 2병을 시켜서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이렇게 운치 있는 러블리한 우중산행은 처음이다... 기분 최고^^ 아버지도 언니도 넘 기분 좋아하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즐겁고 웃음이 만발한다. 셋이서 서로 비밀 유지를 독려하며 친정집으로 걸어간다. 배를 꺼뜨려야 백숙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에 가서 너무 배고프다며 백숙과 함께 연태고량주를 들이켰다. 흐뭇해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우리 셋은 서로 눈짓을 교환한다.
이렇게 러블리 우중산행은 닭백숙과 연태 고량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
오랜만에 언니와도 함께 한 시간, 내리는 비로 아주 진한 숲의 향기를 셋이서 공유하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었던 시간, 아버지와 언니와 셋이며 보안을 약속하며 빗속에서의 소주 한잔... 모든 감각이 그 길에서의 시간에 완벽하게 깨어 있었다. 그 냄새와 소리와 풍경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돼지갈비의 비밀은 약 3주 뒤에 아버지의 자수로 끝이 났다. 어머니는 그럴 줄 아셨다면서 눈은 홀기고 입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