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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Nov 30. 2019

성공하고 싶다면, 부모를 신중하게 선택하라

자식들의 배신감과 독립을 위해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리브스와 이사벨 소힐이 주창한 논문의 결론이다. 오랫동안 미국 내의 세대 간 소득이 미치는 사회적 성공의 변화 추이를 연구해 온 이들의 결론은, '무일푼에서 부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 꿈'이 현재 미국에서는 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Melting Pot이라 불리며 유라시아 전역의 우수한 인재를 마구잡이로 끌여들였던 미국의 달콤한 추파가 사라졌다.


아버지 세대가 자신의 세대에서 하위 20%에 속한 경우, 그 아들 역시 42%가 하위 20%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에 '개천에서 용 나는' 케이스인 상위 20%로 올라선 아들은 불과 8%에 불과한 것이 2010년대 미국의 현실이다.


한국의 경우, 2000년 이후 교육을 통한 계급의 사다리가 사라졌고 이로 인해 신분은 경제적 차별성으로 구분되었다. 조부모의 경제력이 부모와 자신의 신분과 미래 계급을 결정하고 계급 체계는 봉건적 양극화로 들어섰다. 역사적으로 극단적 양극화는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고 마르크스가 예언하는 프롤레타리야 혁명의 단초가 될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를 장식할 듯했던 프롤레타리야 혁명과 사회주의가 꽃피우지 못한 이유는, 계급의 희석화와 원적 신분제의 확대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사적 진화의 길을 자본주의의 화신인 미국과 대한민국에서 역주행하며, 봉건제로 회귀 중이다.


마치 마르크스가 무덤 속에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내 말이 틀린 지 맞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해!"




20세기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적 자원의 고갈을 메꾸기 위해 선거권의 확대가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이루어졌지만, 미국에서는 흑인 등 유색인종의 선거권을 합법적으로 막기 위해 '조부 조항(Grandfather Clause)을 만들어 흑인들의 참정권을 제한했다. 즉 할아버지가 투표할 수 없었던 사람은 유권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독소 조항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과 같은 regulation code가 아닌 암묵적 신분 장벽으로 Grandfather Barrier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위정자들이 하나둘씩 대한민국 국민들의 각 계층에서 이중적 가면을 쓴 채, 야비한 표정으로 높다란 장벽을 등 뒤로 숨기며 기만하기에 이르렀다.


"부모를 신중하게 선택하라!
그러지 않으면 이번 인생은 답이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인류문화사적으로나 말이 되지 않는 비논리의 하소연이다. 나는 부모를 선택한 적도, 자식이라는 존재로 탄생이라는 변화를 겪을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부모 또한 신성한 의도로 자식을 잉태했는지 혹은 쾌락적 행위로 인해 부수적 피해의 결과로 임신을 해 자식을 가지는 불운이 이어졌을지 알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공통된 현실이다. 그런데 내게 어떻게 부모를 신중히 선택하라는 건가?


인간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예로 이해해보자. 개인과 국가의 위기 대응과 극복 방안을 인류사적으로 연구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에서 일부 내용을 차용했다는 점을 밝힌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과 달리 대규모 군사력과 권력을 갖춘 원주민이 없었고, 북미에서 앙숙으로 식민지 패권을 다투던 프랑스, 스페인 등과 같은 경쟁세력이 영국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대규모 군대와 행정인력을 배치할 필요가 없어서 이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식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미국처럼 영국에게 특별히 이익되는 지리, 경제, 정치적 요인도 크지 않았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정복지가 아닌 식민지로 철저히 개발될 수 있었고, 호주인들은 스스로를 해외에 거주 중인 영국인으로 자아를 인식했다.


그래서 호주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던 1차 및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수많은 전몰장병을 만들었고, 이에 대해 자신의 모국 영국을 지킨다는 신민 의식이 확고했다.


하지만 1942년 영국의 10만 육해군이 자전거를 타고 남하한 일본군 2만에게 3일 만에 항복하고 두 척의 해군 함정이 곧바로 격침되어, 호주는 다윈 등 본토가 일본 제로기의 폭격을 당해야 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장에 참여하면 일본군으로부터 호주를 지켜주겠다던 처칠은 속수무책이었고, '지지 않는 태양의 제국'은 더 이상 호주인들을 도울 수 없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게다가 1961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영연방과의 경제적 유대관계를 희생하면서 유럽 대륙 국가들과 경제협력을 선택한 영국의 변심은, 호주인들이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좌절감과 함께 더 이상 영국은 자랑스러운 모국이 아니라 유럽 국가 가운데 하나의 섬나라에 불과하다고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1972년 호주의 고프 휘틀럼 총리는 백호주의를 포기하고 국제연합에 독립국으로써 가입을 결정한다. 1986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법원 판결에 대해 영국 추밀원에 상고할 수 있다는 법안을 폐기했고, 1999년 영국을 '외국'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부모가 운명론적으로 결정된 채 태어났고
그 부모를 성심껏 모시며 희생했다.
하지만 마침내 자신을 위해 호주는 영국을 부모의 자리에서 해임했다."



더 이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울타리가 될 수 없을 지경으로 추락한 부모를 신중한 심사숙고를 통하여 해임했다. 말 그대로 부모를 신중하게 해임했다.



나에게는 부모와의 천륜을 끊을 용기나 모진 결단력이 없다. 하지만 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에 의하여 내 삶을 구속당하거나 불균등과 불평등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자식에게도 이러한 부조리를 남기고 싶지 않다.


버림받을지언정 자식에게 장애가 되는 부모는 절대 되지 않겠다.




이 모든 바람이 너와 나, 모두의 희망이고 애타는 절규일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버림받을지언정 자식의 미래에 사다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 단, 그 사다리는 우리 후손 모두가 함께 탈 수 있는 사다리여야 한다.


그리고 부모에게 더 이상 효도 인륜을 다해야한다는 미명 하에 아들에게 가벼운 짐이라도 지우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조그만 노력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계층 간 소득배분의 순환력 강화, 교육을 통한 계층 간  이동 기회의 사다리 확대, 세대 간의 경제적 자산 상속 저지 등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잘못을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포용력과 이해력이다. 넓은 시야로 멀리 바라보는 시야로 타인의 생각을 포용해야 다. 더 이상의 이전투구와 나를 위해 타인을 설득하려는 아집이 타협이고 협상이라는 착각을 먼저 버려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은 사고의 변화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증대시킬 것이며, 건전한 우리 아버지 세대의 자정을 통해 시민적 덕목(Civic Virtue) 또한 강화될 것이다. 그렇게 나아가는 어느 날이라면, 우리 미래의 길지 않은 세대의 후손들이 이 날의 우리를 분명히 기억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에게 외쳐줄지 모른다.



부모를 신중하게 잘 선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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