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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May 15. 2024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실천24. 해방 필터로 싫은 일 이겨내기

거실 천장을 비롯한 집안 곳곳에 비가 새고, 벽지를 타고 곰팡이 꽃이 피어오르는 집에서 3년 넘게 고생한 끝에, 드디어!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하게 되었다. 손봐야 하는 규모가 큰 만큼 공사기간 동안 집을 온전히 비워야 해서 아이들은 친정에 보내고, 우리 부부는 출퇴근이 용이한 지하철역 근처 작은 호텔에 묵었다. 일주일 동안 손주들과 함께 지내는 즐거움만큼 피로하실 부모님과 엄마 아빠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은 마음 한편에 늘 고여있었지만, 소중한 '해방주간'이 하루하루 사라지는 데 따르는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내 몸만 치장하고 나서는 가뿐한 출근길, 저녁 메뉴 걱정이 사라진 마음 가벼운 퇴근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렁각시님이 다녀간 듯 가지런한 ! 집안일과 엄마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누리는 자유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호텔 주변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서점에 들러 궁금했던 책을 느긋하게 들춰보고, 그렇게 구입한 책을 카페에서 여유롭게 읽고, 호텔로 돌아온 후에는 음량을 크게 키우고 맥주와 함께 넷플릭스를 보는 저녁시간을 마음껏 누렸다.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전 날에는 코인노래방에 들러 데이식스의 '행복했던 날들이었다'를 진심을 담아 열창하기도 했다.)


아이들도 등교와 숙제의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서 동양고전을 공부하시는 할아버지와 함께 서원을 방문하고, 시골집 마당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평일이라 여유로운 놀이공원에서 지치도록 놀이기구를 타고, 엄마의 잔소리 대신 할머니의 오냐오냐 따순말 들으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 듯하다. 서로 떨어져 지내는 동안 매일 저녁 아이들에게 전화해서 "빨리 보고싶어~"라고 말하면서도 그 말이 순수한 진심이 아니라 내심 미안했는데, 일주일 만에 보는 엄마아빠에 대한 반가움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아쉬움 가득한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조금 덜 미안해도 될 것 같았다. 너희들도 그랬구나.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알아.


"엄마, 어떻게 보면 새 집으로 이사한 건데..

 우리 오늘은 짜장면 먹으면 안 돼요?"


짧고도 알찬 각자의 해방주간 뒤에 다시 완전체가 된 우리들은 '비가 새는 집'에서 이제는, 온전히, 제발! 해방되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조촐하게 짜장면 파티를 했다. 천장 누수로 고생하는 동안 아이들마저 '우리 아파트를 지은 시공사 이름만 봐도 화가 난다'고 할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이 쌓여있었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불편했던 상황에서 벗어나니 '비가 샌 덕분에 일주일 동안 학교도 안 가고, 새 집에 이사 온 기분도 난다'며 긍정회로를 돌릴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손주들 수발에 피곤하셨겠지만, 친정 엄마아빠도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마음을 짓눌렀을 딸 걱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셨을 것이다.


'노예 해방', '조선의 해방'처럼 큰 개념으로만 바라보던 '해방'이라는 단어를, '누수 해방', '집안일 해방', '육아 해방'처럼 라는 작은 사람에게 원 없이 빌려다 쓴 한 주였다. 비 새는 천장은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해방'되어 더없이 기쁜 일이지만, 아이들 없이 즐기는 퇴근시간은 결국 '끝이 있는 해방'이었기에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역시 매일 늦잠 자고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등교하는 일상이 있었기에 일주일의 현장체험학습 기간이 더욱 행복했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일명 퇴사짤로 널리 알려진, 유명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다시 찾아보았다. 상큼한 목소리로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을 외치며 날아가는 여자주인공의 모습에서 회사원들이 어떤 쾌감을 느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죽지 않는 이상 '모든'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긴 어렵지 않을까 싶지만. 적어도  오늘의 고되고 지친 하루는 다른 날 를 또 어떤 해방으로 이끌어줄지 궁금하고 기대되는 마음을 필터 삼아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 마음이란 참 요상해서 나를 얽매고 구속하는 굴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언젠가는 그리워질지도 모르니까, 내가 벗어나고 싶은 걸 통해서 내가 원하는 걸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 (가령, 비가 새지 않는 정상적인 집이라던지, 누수가 발생하면 바로 처리해 주는 시공사라던지, 입주민을 이해해 주는 관리사무소라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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