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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Dec 06. 2024

짧은 머리, 긴 생각

출근하는 내 모습을 보고 사무실 동료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머, 누구세요?"

"무슨 충격적인 일이라도 있었어요?"

1년 반 넘도록 방치하며 가슴까지 기르던 머리를 겨우 귀를 가릴 정도로 짧게 자른 탓이었다. 워낙 큰 변화라서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사무실에 들어섰지만,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변명하듯 서둘러 헤헤헤 바보 같은 웃음도 지어 보인다.


한 달에 한 번, 두 아이들 머리를 다듬으러 미용실에 드나들면서도 정작 내 머리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 생각보다 비싸서 평소에 발걸음이 어려웠던 미용실에서 마침 50% 할인 이벤트를 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고 주말 오전 시간에 예약을 잡았다.


같은 악보를 보고 연주해도 피아노의 상태에 따라,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달라지듯이, 사진 속 헤어스타일이 내 머리카락과 얼굴을 만나면서 예상과 다른 멜로디를 탄생시키는 과정을 몇 번이고 겪은 터라 디자이너 선생님과 스타일을 상담하는 시간은 늘 묘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사실 딱히 정해둔 스타일도 없었다. 그저, 원피스 지퍼에 걸리고 식사 중 국물에 빠지는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나, 세상에. 머리를 자르는 과정은 생각보다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서걱서걱 가위가 지나간 자리에 목덜미가 드러나는 순간 없는 쾌감마저 느꼈다. 상한 알면서도 방치했던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것처럼, 삶에서 나를 어지럽히던 생각의 부스러기들을 정리하고 싶었나 보다. 발밑에 쌓인 머리카락 더미가 어쩐지 과거의 못난 조각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오랜 습관, 미련, 불필요한 걱정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무거운 어깨가 가벼워지는 기분마저 들어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홀가분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상하고 갈라진 머리카락이 가위질 한 번에 사라지듯 내면의 변화도 이토록 간결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의 손길 한 번으로 불만족스러웠던 내 모습이 산뜻하게 변할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가뿐해질까...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항상 첫 시작이 어렵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을 흐린 눈으로 넘어가는 것도, 과감하게 변신하는 것도 모두 결국 내 손에 달렸다. 


미용사의 가위가 머리카락을 자르듯, 나 역시도 내 마음속에 쌓인  걱정이나 버리고 싶은 습관들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자). 미용실에 가기 전에는 그저 피곤함을 핑계로 미뤄왔지만, 가벼워진 머리와 함께 내 안에 자리한 복잡함도 이제는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아서, 피곤해서, 시간이 없어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못 본 척해왔던, 다양한 고민을 가진 내 마음 속 수많은 나를 떠올려본다. 산발머리 그들을 위해 미용사로 변신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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