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동인 자연스레 한 마리의 개가 되어 내가 어떤 길목을 어슬렁거리며 다녔는지 기억을 더듬어보게 된다.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유독 윤기 나는 탐스러운 털을 가졌거나 주인이 입혀준 예쁜 옷을 입은 강아지들을 쳐다보게 될 때가 있다. 귀여운 마음에 잠깐 눈길을 주긴 하지만 스치고 나면 그만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강아지도 그럴 것이다. 주인을 따라 얌전히 걸어가는 애완견을 '개'라고 부르면 무신경한 사람이 되는 시대지만 애완견이 되기를 거부한 개를 본 적이 있다.
십 년 전 북한산 자락에 살 때, 정오쯤 되면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 단지 안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동 앞의 계단에 앉아있곤 했다. 그 무렵 뉴스에는 버림받은 개들이 산으로 흘러들어 가 들개가 되어 무리 지어 다닌다는 이야기가 방송을 타기도 했었다. 어린 딸을 키우던 나는 목줄에 매이지도 않은 큰 개가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게 신경 쓰여 이웃 할머니에게 "저 개 구조대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 물까 봐 겁나요"'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소용없다고 했다. 신고를 받고 그물까지 든 구조대가 몇 번이나 왔는데 차 소리를 듣자마자 산으로 사라져 버려서 번번이 실패했다고 했다. 다행히 '누렁이'는 사람도 해치지 않았고, 오며 가며 밥을 주면 '지 자리' 앉아서 조용히 먹고 간다고 했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서며 주위를 살피다 문득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누렁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만 해도 한 번도 동물을 키워본 적 없던 터라 그 눈빛에도 그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딸의 손을 꼭 쥔 채 애써 태연한 척하며 '수야, 오늘도 누렁이가 왔네. 누렁아 안녕' 하며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누렁이는 우리 모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벽돌 계단 참에서 햇살을 즐길 뿐이었다.
그 이후에도 누렁이를 볼 때마다 사람들을 쳐다보는 태도가 하도 무심하고 태연해서 마치 사람들이 '누렁이'의 동네에 마실을 온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어느 날 멀리서 본 누렁이는 털이 영 푸석해지고 움직이는 게 둔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누렁이가 새끼를 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누렁이가 불쌍하다며 자주 밥이 될만한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후 얼마 안 가 누렁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누렁이가 앉아 쳐다보고 있을 것 같은 자리엔 햇살만 가득했다. 산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느라 바쁜 건지, 새끼를 낳다 잘못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최준의 <각기 걸어가고 있는>을 읽고 나서 오래전에 만났던 누렁이가 떠올랐다. 배를 곯기도 하고, 구조대에 잡힐 뻔하기도 하고, 새끼를 배기도 했던 누렁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온갖 일을 고스란히 겪으며 혼자 걸어가던 누렁이와 나는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비슷한가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