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고인다
이문재
봄이 고인다.
공중에도 고이더라.
바닥 없는 곳에도 고이더라.
봄이 고여서 산과 들에 물이 오르더라.
풀과 나무에 연초록
연초록이 번지더라.
봄은 고여서
너럭바위도 잔뿌리를 내라더라.
아지랑이 훌훌 빨아들이더라.
천지간이 더워지더라.
꽃들이 문을 열어젖히더라.
진짜 만개는 꽃이 문 열기 직전이더라.
벌 나비 윙윙 벌떼처럼 날아들더라.
이것도 영락없는 줄탁 줄탁이려니
눈을 감아도 눈이 시더라.
눈이 시더라.
오늘 새벽에 차를 타고 집을 나서자는데 하얀 꽃망울을 가득 매달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인데도 하늘의 달마냥 혼자 환했다. 해마다 봄을 알리는 꽃과 나무들이 있었다. 어느 해는 노란 산수유가 유독 눈에 뜨였고 작년엔 매서운 꽃샘추위에도 혼자 하얀 꽃이 피어있던 매화나무를 보면서 봄이 왔다는 걸 알았다. 일단 눈에 꽃이 보이면 아무리 찬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도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이미 때가 온 것이다.
내가 꽃을 보았던 날은, 가을 겨울을 나던 나무가 언 땅에서 물기를 빨아올리고 얼음처럼 찬 공기 속에서도 햇빛을 향해 몸을 열어두며 보낸 나날 중의 하루였을 것이다.
어제까지 헐벗은 채 서있던 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얀 꽃을 달고 있는 일, 뱃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 날 내 품에 안겨있는 일, 속에 천불을 내고 엎드려 통곡하게 했던 아이가 말통 하는 친구가 되는 신기한 일, 한때 내 모든 것이었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유행 지난 소문처럼 잊혀버리는 일. 매일매일은 별다르지 않게 지나왔지만 나는 벌써 몇 번이고 다른 세계로 넘어왔고 매번 그 세계의 사람이 되어 살아왔다. 내가 알았던 모든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수많은 봄이 지나갔는데도 또 봄이 고이고 있다. 생전 처음이라는 듯이 방실거리며 웃는다. 그래서 봄이 고이기 시작하면 너나 할 것 없이 하늘 쳐다보고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