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by 루씨

월요일에 신장 내과 과장님과 상담을 마치고 오늘 오후에 퇴원 수속을 마쳤다. 어머니는 아직까지 골절된 척추 뼈가 붙지 않아서 한걸음도 못 걸으신다. 그래서 아버님과 남편이 어머님의 양쪽 팔을 부축해 휠체어에 앉힌 다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집으로 가는 동안 혹시 이동을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남편이 축 처진 어머니를 그대로 둘러업고 계단을 올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해 둔 환자 침대에 어머니를 간신히 내려놓았다. 옆에서 도우는 아버님도, 보고 있던 나도, 업어 나른 남편도 진땀을 흘렸다. 순간 '어머님은 왜 이렇게 끝까지 아들을 힘들게 하실까' 원망이 올라왔다. 사실 모든 사랑도 결국은 짐이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랑받았던 기억을 깨끗이 지우기도 하고 도리어 학대받았고 상처 입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힘든 짐을 피할 수는 있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그 삶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곧 그 사람의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한 달 보름 만에 집에 돌아오니 아버님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지셨다. 작은 방에 침대를 놓느라 거실로 빼놓은 짐들을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정리하셨고 자주 웃으며 농담도 하셨다.

"이번 여름은 하도 바빠서 선풍기도 한번 못 틀어보고 지나가 버렸어."

아버님이 들고 옮기는 선풍기는 정말 작년에 싸둔 비닐 커버가 그대로 씌워져 있었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거다.

아버님이 작은 방에서 나오시며 말씀하셨다. "엄마가 이제 집에 온 게 실감이 나나보다. 지금 혼자 울고 있어."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아버님의 표정은 뿌듯해 보였다.


병원에 계실 때 어머님은 퇴원한다는 얘기가 나온 후, 말수가 더욱 줄어들었다. 지난번 퇴원 후에 집이 아니라 요양원으로 가셨던 것이 어머니에게는 무척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보호자의 체력은 바닥나고 그에 비해 환자의 회복은 더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아무리 머리로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도 '요양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주거 공간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삶의 공간이 바뀌는 것 자체가 단순한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집'이란 내가 '나'로 존재하게 하는 곳이고 거기에는 나임을 증명해 주는 관계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린 그런 관계와 물건들 사이에 있을 때 비로소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내가 덮던 이불과 읽던 책이 놓여있는 소파, 냉장고에 붙어있는 딸들의 네 컷 사진과 전날 먹던 찌개가 담겨있는 냄비 같은 것들.

그렇다. '덮던', '읽던', '먹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많은 물건들은 여전히 나의 삶이 현재진행형이라는 명백한 증거들이다.

생각해 보면 우린, 집이 아닌 공간에 있을 때 거기서 얻어야 할 뚜렷한 목표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출장에서, 심지어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행한 여행조차도 말이다.


침대에 딸린 식탁에 차린 이른 저녁을 어머니는 깨끗이 비우셨다. 그리고 퇴원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찾아온 막내 동생을 만났다. 그분 역시 올초에 큰 수술을 받고 겨우 일상을 회복하셨는데 "누나. 다음은 내 차례야."라고 웃으며 인사하시자 어머니는 "먼 데서 왜 왔냐'며 반가워하셨다.

내 집에서 눈을 뜨고 밥을 먹고 가까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일상을 빼앗기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이번에 깨달은 '웰빙'이자 '웰 다잉'이었다.

남편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수동에 들러 서울숲을 한 바퀴 걸었다. 아치형으로 된 나무다리를 건너는데 검은 연못 물 위에 둥그런 달이 떠있었다. 추석을 이틀 앞둔 밤, 하늘 위의 달을 쳐다보거나 물 위에 고요히 흔들리는 달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지나 우리도 고단한 하루를 숲 속에 남겨둔 채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