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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Jan 14. 2024

"Glimpse" 스쳐 지나가는 것은 누구인가.

Megan Mengies 전시회

올해부터 동네 미술관 기행 글을 일주일에 한편씩 올리려고 했는데 벌써 이 주가 지나갔다. 미술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으면서 이러쿵저러쿵 글을 써도 되나 싶은 자기 검열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 짬짬이 미술관에 다니곤 한다. 도슨트 설명도 번거로워서 피하고 헤드셋도 대여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 기준 없이 미술관을 쏘다니다 오는 게 즐겁다.

사진 찍고 그 밑에 제목 달고 느낌 적고. 그렇게 기록하니까 전시 작품을 요모조모 다른 각도로 보게 되고 가끔 그림이 말을 건네기도 한다.


다시, 매주 동네미술관을 다녀오자는 올초의 계획을 떠올리고 1월의 전시를 찾아보다가 두 팔 사이로 고개를 파묻은 채 엎드리고 있는 젊은 여성을 클로즈업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은 <Sunblind>. 영국 태생의 젊은 작가 Megan Menzies의 작품이었다.


Sunblind 2023

거친 시멘트 벽에 긁힌 살갗을 마주했을 때처럼 화면 가득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슬픔 혹은 우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명백한 감정이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어깨가 들썩이고 뺨이 붉어지는 순간의 느낌이 선명하게 포착되어 있었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반(半)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관계의 리모델링 속에 서있다. 가깝다 멀어지기도 하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사람사이의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에 없던 일련의 일들로 인해 세상이 좀 달라 보이기까지 하니 내 나름대로 이 상황을 짚어보고 싶었다.

처음엔 다들 나이 들면서 왜들 이렇게 속이 좁아지고 유치해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다가 이젠 슬슬 자기반성이 올라오는 중이다. 조금 더 성질을 죽였어야 한다거나 부드러운 말투를 썼어야 한다거나 하는 대인 관계의 스킬에 관한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생겨먹은 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진즉 커밍아웃했어야 한다는 후회에 가깝다. 그 시기를 이십 년쯤 앞당겼다면 지금쯤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어있었거나 글 쓰고 책 읽기에 좀 더 진심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남과 사이좋게 지내는 데 신경 쓰느라 정작 나와의 사이 불화했었다는 걸 이제야 눈챘다.

Tank, 2023

열 평 남짓한 공간에 혼자 그림을 보는 게 멋쩍어 잠시 바깥을 바라보다가 문득

7년 전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오십 대의 엄마가, 날마다 서로 집을 오가며 반찬을 나누던 미선이 아줌마랑 다투고 발길을 뚝 끊었던 일이 왜 떠올랐을까. 암투병 중일 때 그 친하던 여고 동창들이 자기들끼리만 미국여행 간 걸 알고 괘씸하다고 울분을 토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왜 쟁쟁하게 살아났을까. 언니가 아픈데 동생이라고 코빼기도 안 보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엄마는 결국 하나뿐인 여동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Green screen, 2033
Glimpse, 2023

차창 밖으로 풍경이 스쳐 지나가듯 그런 것쯤이야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혀버리는 일이다. 잊혀버리지 않는다 해도 그깟 일이 무슨 대수랴. 그래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모로부터 "언니, 좀 어때."라는 전화 한 통이라도 받았더라면 엄마의 뺨이 잠깐 데워졌을 것 같긴 하다. 그랬던들 이제와 그게 무슨 대수랴만은.

Lobe, 2023

갤러리를 나오며 전시제목이 박힌 포스터를 다시 본다. <Glimpse>. '언뜻 보고 지나침'.

스마트폰과 함께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드는 하루는 '스쳐 지나감'으로 가득 차있다. 포털에 오른 수많은 사건들을 스쳐 보내고, 근사한 카페와 맛집과 신상을 스쳐보다가 캡처하고 링크한다. 하지만 다시 보기 전에 이미 새로운 것들이 도착해 있고  그 역시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버린다.


기차 객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땐 풍경이 빨리도 지나간다 생각했지만 정작 시속 200킬로로 달리고 있는 건 나였듯이,

이젠 좀체 얼굴이 붉어질 새가 없다. 귓불이 발개질 새도 없다. 동네미술관을 돌아다니다 문득 뺨이 붉어지도록 웃었던, 혹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던 한 때가 떠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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