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솥
무소의 뿔이 아니라 무쇠솥처럼 나아가는 건 어떨까.
훌륭한 내구성과 보존력이 좋은 만큼 무겁고 느린 무쇠솥은 내가 애증 하는 물건이다.
프랑스에서 요리를 배우면서 무쇠솥은 매일 함께 하는 친구였다. 요리학교에는 크고 작은 무쇠솥, 냄비, 팬이 있었고 실제 프랑스 레스토랑에서도 꽤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일 년 넘게 이것을 들었다 놨다, 이쪽저쪽 돌리다 보니 약해지는 건 내 손목과 어깨뿐, 무쇠솥은 여봐란듯이 작은 스크래치만 났을 뿐 멀쩡하다. 그때 약해진 손목이 출산 후에는 더 시리게 느껴졌을 만큼 후유증이 깊어 남편이 한동안 무쇠솥을 봉인해 버렸다.
슬슬 몸이 회복하면서 나는 비밀스러운 보물상자를 열듯 몇 번이고 감싸져 있는 신문지 포장을 뜯어 솥을 닦았다. 명품 가방도 아니고 조심조심 꺼내 커다란 솥 하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나 자신이 조금 우습긴 했다. 쓰고 난 다음 세척해서 윤이 나게 기름칠을 하다 보면 시간도 걸리고 무거워서 또 한동안 안 쓰게 되지만, ‘언제나 거기 있음‘에 나는 마음 한 구석이 든든하다. 요리에 신경 쓴 티를 좀 내고 싶은 날에는 무쇠솥에 밥을 짓거나 뭉근하게 끓인 스튜를 상에 올린다. 고급 재료가 아니더라도 넉넉히 올리기만 하면 손님들이 우와, 감탄하게 만드는 무쇠솥의 마법.
그 마법은 사실 뾰로롱 하고 한 방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무쇠솥 바닥에 열이 오르고 솥 전체가 따뜻해지려면 일반 냄비보다 서너 배쯤은 시간이 더 소요된다. 나도 그렇다. 뭔가 시작은 잘 하지만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으려면 남들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타입이다. 무쇠솥처럼 한 번 오른 열이 오래가는 편인 것도 닮았다.
청아한 빛깔의 도자기나 투명하고 여리한 유리가 아닌 투박하고 속이 잘 안 보이는 무쇠솥인 것도 참 나 같다. 친구들이 너는 스트레스를 받긴 하냐는 질문을 할 만큼 나는 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최근에 받고 나는 속으로 놀라 며칠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 안에서는 누룽지가 부글부글거리듯 무언가 항상 들끓고 있는데 겉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였구나. 누군가 뚜껑을 열어주면 나는 참았던 열기를 내뿜듯 토해내고 마는 것이다.
일부러 숨기려고 한 적이 없는 나의 성향에 의한 것임을 이 또한 천천히, 알아갔다.
고기를 숭덩숭덩 썰고 저민 양파를 오래 볶아 뭉근하게 끓인 카레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먹을 솥요리 되겠다. 넉넉한 한 솥은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