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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샘 Jul 16. 2016

나는 마침내 사진을 찍는 것을 잊어버렸다

2016.07. 제주 정원여행 - 절물자연휴양림

한라수목원에서 오전 내내 비를 흠뻑 맞고, 지쳐서 잠시 근처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쉬었다. 한참을 쉬다가 오후에 절물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이날 나는 제주의 숲을 제대로 느끼기 전에는 숙소에 들어가지 않을 기세로 움직였다. 절물자연휴양림은 하루에 세 번 오는 버스 말고는 버스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체력을 아낄 겸 그냥 택시를 잡았다. 택시로도 한참이 걸리더라. 제주도는 역시 넓다. 


여기는 예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지인 프리웨딩 촬영 때문에. 그때, 드넓은 숲과 사이사이 떨어지는 빛에 놀라서 언젠가는 순수하게 숲을 찍으러 이 곳에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 곳을 다시 찾았다. 






난 행복해



다행히 비는 그쳤다. 이제야 우비와 레인커버를 벗어던지고 꽤 가볍게 숲길을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아직 체크인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기 전까진. 





여전히 입구 근처에는 이끼를 두른 곧은 나무들이 빽빽이 모여있었다. 온 사방이 초록빛이었다. 

입구에서 신나서 걷다가, 중간에 프리웨딩 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봤다. 이 궂은날에 많이 고생하신다고 생각했고,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좀 더 옆 포인트에서 찍었는데. 


처음 입구를 넘었을 때의 기쁨이 조금은 진정됐을 즈음, 나는 장생의 숲길로 들어갔다. 그때는 못 가봤던 그 길을 나 혼자서 온 이제는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장생의 숲길은 하절기에는 오후 4시부터 들어갈 수 없다. 한라산처럼 시간제한이 걸려있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이 숲길 총길이가 13킬로미터 정도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저번에 절물을 정말 겉만 봤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입구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장생의 숲길 입구 근처에서 잠시 비자림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이내 본래의 수직적인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높은 나무들 아래에는 이끼와 고사리들이 모여있었다. 


중간중간 벌로 추정되는 웅웅 소리가 들리는 구간이 있었는데, 여긴 재빨리 뛰쳐나갔다. 





높은 나무와 낮은 나무들이 숲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봐도 빛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역시나 숲에서는 셔터스피드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바람소리

4K 원본 


새소리

4K 원본



중간중간 동영상도 찍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너무나도 놀라워서. 

헌데 집에 와서 보니 내가 왜 저런 카메라워크를... 그냥 삼각대나 어디 바닥에 놓고 소리만 제대로 땄어도 될 것 같은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집에 와서 영상을 다시 보니 문득 마이크를 사고 싶어졌다. 



비가 오면 길이 늪으로 변한다.



계속 길을 걷다가 어느 틈엔가부터 사진을 잘 안 찍게 되었다. 길이 생각보다 긴 것도 있었고, 중간중간 길이 험했던 것도 있었고, 아직 체크인을 못해서 모든 짐을 다 들고 있던 것도 있었지만, 그냥 걸으면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사진을 찍느라 집중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사진을 찍는 것을 잊어버렸다. 






한두 시간 정도를 걷다가 사거리가 나왔다. 장생의 숲길을 계속 걸을지, 입구로 빠져나갈지 선택할 수 있는 구간이었다. 솔직히 좀 많이 지쳤고, 체력 안배를 위해 이쯤에서 장생의 숲길을 뒤로하고 나오기로 했다. 


남은 숲길은 언젠가 마저 걸을 수 있기를. 




장생의 숲길을 빠져나와 입구로 향하면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거리에서 입구 쪽으로 나가는 길은, 장생의 숲길보다 좀 더 넓고 쾌적했다. 

그리고 나무들은 이전의 숲 속만큼이나 거대했다. 


비오곤의 매력



보랏빛 파란빛 산수국들과, 푸른 수국들이 캠핑장 근처에 피어있었다. 수국이 딱히 유명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 도처에 있는 모양이다. 





근처 호수가는 이 숲에서 하늘이 넓게 보이는 몇 안 되는 장소인 것 같았다. 숲에 있다가 나오니, 흐린 하늘도 맑아 보인다. 



 


숲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나는 프리웨딩을 찍었던 곳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문득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 이 순간만큼 무언가 벅차고 재밌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화려하고 빽빽한 기쁨이었다면, 지금은 맑고 시원하게 트인 기쁨이었다. 



35mm 렌즈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데, 이런 느낌 때문에 화각 겹침과 수동임에도 불구하고 비오곤을 팔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 작기도 하고.


다음번에 올 때는 꼭 장생의 숲길 나머지 부분을 돌아보겠다고 다짐하고 내려와 숙소로 향했다. 






섬에 왔으니까 예의상 바다는 봐야지


절물을 빠져나와 숙소로 가기 전, 법환리 근처로 가서 플라워카페에서 노닥거리다 바다를 보고 들어갔다. 탁 트인 바다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넓은 숲을 보고 오니 다소 감흥이 덜했다. 이번 여행에선 바다를 보지 않을 생각이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지만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곳을 기회가 닿아 다시 올 수 있었다. 남들은 쉽게 가는 제주가 나는 왜 이리 가기 힘든지. 구름과 바다 같은 무한함을 가진 숲길을 걸었다. 비록 나는 전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낮 내내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고, 저녁에 양쪽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자야 했지만, 숙소에서 사진을 리뷰하면서 더없이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날 숲 속에 있었다고.  




신비한 소리에 놀라, 카메라를 산 이후 테스트용으로만 썼던 영상 촬영을 해봤다. 다음에 이런 곳에서 영상을 찍을 때는 삼각대나 어디 바위 위에 올려놓고 덜 흔들리게 한 뒤, 좋은 마이크를 써서 소리를 더 생생하게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숲 속은 빛이 잘 들지 않는다. 맑은 날은 편차가 심하고, 흐린 날은 광량이 너무 부족하다. 대부분의 순간에서 iso값을 무진장 올려야 했고, 힘든 상황에서 흔들릴까봐 연속으로 여러 장 찍거나, 그것도 부족해서 조리개를 풀어서 담아야 했다. 주변부까지 깨끗하게 담고 싶은 사진들을 최대개방으로 담아야 해서 아쉬웠던 순간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런 느낌도 나름 괜찮았다. 모든 곳이 선명한 사진과는 다른 공간감이 느껴지더라. 


문득 글을 쓰다 보니, 이 곳은 눈이 오는 날 가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특히 장생의 숲길을 걸을 거라면.






w_ A7R2, Loxia 2/35




LumaFonto Fotografio

빛나는 샘, 빛샘의 정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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