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초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샘 Sep 06. 2016

변화의 숲

2016.07. 제주 정원여행 - 사려니숲길

이곳저곳 정원과 숲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덧 여행 마지막 날이 되었다. 

비행기가 오후 시간대라 한 곳 정도는 더 돌아볼 여유가 있어 보였다. 주변에서 많이 들어봤지만 못가보고 있었던 사려니숲길을 돌고 가기로 했다. 숙소 체크아웃을 마치고 터미널에서 782-1번 버스를 타고 사려니숲 근처까지 갔다. 이번 여행에서 택시를 빼고 제일 많이 탔던 게 782번과 782-1번 버스였던 것 같은데, 중문이나 주요 포인트들 대부분을 거쳐가더라. 


 






교래입구 정류장에서 내려서, 대충 20분 정도를 걸어가면 사려니숲길 북쪽 입구가 나온다. 걷는 길 내내 곧고 높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나흘 만에 드디어 파란 하늘이 보였다. 


사려니숲길 북쪽 입구 근처에는 새왓내 숲길 순환로가 있었다. 주도로가 순환로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데, 각 반쪽이 대략 20분 정도 길이라고. 나는 오른쪽 길을 택했다. 





순환로에 접어들자마자 해가 들어오던 것이 사라지더니 갑자기 그늘이 졌다. 그늘이 지고 해가 떴다를 반복하는 변화무쌍한 날이었다. 

북쪽 입구 근처는 비자림 느낌의 나무들과 고사리들이 한가득 있었다. 



이렇게 잔뜩 흐리다가
금방 빛이 들어오고 사라진다.



해가 들고 구름이 껴서 어둡기를 반복하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 다행히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진 않았고, 숲이 우거져 있어서 비를 그렇게 많이 맞지는 않았다. 체크아웃한 뒤라 모든 짐을 들고 다녀서 귀찮았는데 우비를 챙겨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가 왔다. 





중간중간 해가 들어왔는데 딱 3초 동안 빛이 들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시 언제 해가 뜰지도 모르고 빛은 거의 운에 맡겨야 하는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흔한 숲 속과 마찬가지로 빛이 매우 적었다. 심도를 올리자니 삼각대는 없고, 심도를 낮추자니 주변부가 거슬리든가 하는 식이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비가 내리면 그냥 비를 맞으며 담고, 빛이 들어오면 빛이 들어옴을 알며 담았다. 절반에 가까울수록 점점 침엽수 비율이 높아져가고 있었다. 





절반 좀 못 간 지점에 물찻오름 입구가 있었다. 여기까지 한 시간 반 정도를 쓴 것 같다. 

원래 계획은 절반까지만 찍고, 북쪽 입구로 돌아와 제주시내에서 노닥거리다 공항에 가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나머지 절반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육지로 돌아가면 제주에 언제 올 줄 알고. 


그래서 나머지 절반을 마저 걷기로 했다. 





절반을 넘어가니, 수국 꽃길이 펼쳐져 있었다. 거의 모든 구간에는 길가에 푸른 산수국이 피어나 있었다. 여태껏 제주 정원에서 봤던 구름 같은 느낌은 없지만, 가는 내내 꽃길이라 기분이 좋았다. 


물찻오름 전후로 길 한쪽은 침엽수고 다른 한쪽은 활엽수가 자라고 있었다.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북쪽에서 2/3 지점에는 월든 삼거리 삼나무 숲이 있었다. 가는 길 내내 점점 침엽수 비율이 늘어간다 싶더니, 여긴 아예 빽빽한 삼나무 숲이 나왔다. 마치 절물휴양림을 고도로 농축해놓으면 이런 느낌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서도 24mm 생각이 났다. 앞에 나무들이 걸리적거리는 경우가 많아 구도를 잡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삼나무 숲을 지나 동쪽 입구로 가는 내내 하늘빛이 어두웠다가 밝다를 반복했다. 





동쪽 입구까지 30분 남겨놓은 지점에서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진다. 진짜 우기도 아니고... 



찍어 / 네? / 찍으라고



뭐 비가 오든지 말든지 그냥 담았다. 사실 비올 때 느낌도 나쁘지 않다. 

몸이 피곤하고 카메라가 젖고 셔속이 안 나와도, 나는 여전히 즐겁고 사진은 예쁘니까 괜찮아. 





동쪽 입구 근처에는 붉은오름이 있나 보다. 이쪽 근처는 숲 사이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북쪽부터 내려오는 동안 대부분 한적했던 길은, 동쪽 입구 근처에서 제법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길 안에서는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비는 그쳐 있었다. 모두 걷는 데 3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북쪽부터 동쪽까지 걷는 동안, 하늘도 공기도 빛도 풍경도 끝없이 변화했다. 편히 닦인 길을 천천히 걸으며 다양한 풍경을 만났다. 제주에서 여태껏 봐왔던 모든 종류의 숲이 길을 걷는 내내 펼쳐졌다. 내 이목구비와 카메라 메모리카드에 들어오던 모든 것들은 숲길을 걷는 동안 변화했고, 처음 들어갈 때의 설렘과 기대감은 나올 때 기쁨과 개운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오 ㅋㅋ



제주시로 오니까 그 많은 구름들은 나흘 내내 서귀포에만 몰려있던 모양이다. 제법 선연한 하늘이 펼쳐져 있음에도 매우 약이 오르다가, 이내 기분이 진정되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햇살이 가득해서 다행이다. 



그 뒤로는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쉬고, 선물을 사며 놀았다. 지난 여행 때 면세점에서 못 구했던 개별 포장된 보석귤을 찾아 동문시장을 돌았다. 



안녕,


마치 차가 막히는 것처럼 못 뜨던 비행기가 뜰 때, 하늘에 무지개가 보였다. 







제주에서 나흘 동안 비를 맞으며 3,200컷 정도를 찍었다. 처음으로 장거리 여행에 180마를 가져갔고, 이렇게 비 오는 날을 집중해서 오랫동안 담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이 여행 전에 가장 최근에 제주를 들렀던 때가 2년 전인데, 그때는 아직 내가 뭘 주로 찍고 싶은지 몰라서 그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하늘도 숲도 바다도 담았다. 지금은 내가 뭘 주로 찍고 싶은지, 뭘 찍으면 제일 기쁜지를 알아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들만 들렀다. 


거의 대부분을 숲과 정원에서 보냈지만, 중간중간 바다를 보며 멍때리기도 했고, 오설록에서 롤케잌도 먹고, 면세점 쇼핑도 하고 나름 할 건 다 하고 온 것 같다. 



모든 사진을 리뷰하고, 그때의 기억들을 다시 되새겨 글로 적을 수 있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이거 분명 7월 초에 갔다 온 건데... 


길을 걷는 내내 다양하게 변했던 이 숲처럼, 다음 여행은 지금 여행보다 더 즐거운 기억과 아름다운 사진을 가져올 수 있기를. 


  






w_ A7R2, Loxia 2/35 




LumaFonto Fotografio

빛나는 샘, 빛샘의 정원사진


_


매거진의 이전글 태고의 초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