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 위에 올라온 인연들
시계를 고른다는 것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지만,
내게는 ‘선택의 흔적’이기도 하다.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기다렸고, 무엇을 받아들였는지를
조용히 기억해주는 어떤 장면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시계를 고르기 전에
‘이걸 가질 수 있는가’보다
‘이 시계가 내 서랍 안에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운가’를 먼저 상상한다.
첫 번째, “이건 내 거다”라고 말했던 시계 – 뻬를리
가장 먼저 나에게 왔던 시계는 작은 골드 시계였다.
당시의 나는 조금 어렸고,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지만
그 시계만큼은 손목에 얹는 순간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
빛나기보다 선명한 선을 가지고 있었고,
여름 햇살처럼 눈부시진 않아도
어딘가 내가 지향하던 균형에 가까웠다.
그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인상이 아니라
내 손목을 내가 바라보며 처음으로 느꼈던 ‘자기 서사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그대는 예정되어 있었다” – 베누아
베누아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상하게 익숙했다.
‘언젠가 내 서랍 안에 들어올 것이다.’
설명하기 힘든 그런 예감 같은 것.
화이트골드, 타원형 케이스, 얇은 다이아 테두리.
그 구조는 오래된 유럽의 드로잉 한 장면 같았고,
정제되었지만 과하지 않았으며,
손목 위의 곡선을 가장 말끔하게 정리해 주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계를 착용하고 나서야
내 손목이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던 곡선의 형태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세 번째, “내가 될 줄 몰랐던 그 대상” – 팬더
가장 예상 밖이었던 건 팬더였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시계가 나와는 다른 영역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좋아하지만 닿을 수 없는,
존재는 알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구조.
그러던 어느 날, 매장에서 아주 우연히 마주쳤다.
그리고 뜻밖에도 나와 잘 어울리는 그 모습에
살짝 숨이 멈추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건 이전까지 스스로를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해온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조용히 “사실 그 모습도 너에게 어울려”라는
허락을 받은 듯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계를 고른다는 것
나는 지금도 시계를 고를 때,
그 시계가 얼마나 유명한가, 혹은 예쁜가보다
내 서랍에 들어갔을 때 그 풍경이 어색하지 않은가를 먼저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예거 리베르소를 착용해본 적도 있다.
그 시계는 나쁘지 않았고, 분명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5%쯤 어긋나는 감정이 남았다.
그건 디자인도, 가격도 아닌
단순히 ‘내 이야기와 겹치는 면의 밀도’ 같은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시계를 골랐다.
누군가에게 어울린다는 말보다
내 기억 속 장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가를 기준으로.
마무리하며
나는 여전히 하루를 살아가는 시간보다
그 시간을 담는 구조와 감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금 내 서랍과 마음의 서랍 안에는
서로 다른 구조,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감정의 시계들이 있지만
그 모든 선택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던 순간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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