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와 테라피스트의 시선
아나운서의 시선_
인간에 대한 예의 두 번째, 타인에 대한 공감
[염태영/더불어민주당 의원]
"저와 같이 심야 배송 하루 12시간 택배 업무 같이할 것을 제안합니다. 세 번 배송을 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택배 노동자 고충을 느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해롤드 로저스/쿠팡 임시 대표]
"함께 배송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원님도 원하신다면 같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객정보 유출과 물류 노동자의 연이은 사망에 대한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한 의원이 심야 배송을 체험할 것을 제안하자 미국인인 범 킴, 김범석 대표를 대신해 나온 역시 미국인인 로저스 임시 대표는 함께 하자는 말로 응수 했다.
정치인이나 재벌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혹은 좋은 이미지가 필요할 때 일회성으로 노동자들 혹은 서민의 삶을 체험해 보는 행사 혹은 봉사활동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접해왔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체험은 공감을 위한 수단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공감을 위한 체험이 목적이라기보다, 보여주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많아 수많은 카메라가 따라붙는다. 정해진 시간 안에 기사를 출고해야 하는 미디어의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진지한 체험과 성찰보다는 이미지 만들기가 목적인 체험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현장에서는 빠른 속도로 수많은 플래시가 터져 나오며 소위 말하는 ‘그림’이 만들어진다. ‘그림’의 패턴도 정형화되어있다.
새벽에 환경미화원을 따라 분리수거 차량에 탑승하거나 낙후된 쪽방 촌에 연탄을 배달한다던가, 장애인시설을 찾아가 목욕을 시킨다던가, 노숙자들을 위한 배식에 참여한다던가…….
그리고 간혹 재난 상황이 벌어지면 미담에 필요한 ‘그림’을 만들려는 이들로 인해 재난극복에 집중해야 할 현장에서는 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몇 해 전 수도권에 폭우가 쏟아져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린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나온 한 국회의원이 내뱉은 말은 방송국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히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파장을 생각 못하고 무심결에 나온 그의 한마디는 아마 진심이었을 것이고 사진이 목적이었던 그의 진심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 여론의 질타를 받았으며 결국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려 한 사람의 손이 아쉬운 절박한 현장에서 보이는 그들의 진심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의 단상을 보여준다. 이런 단상이 이미지화된 사진과 짧은 영상으로 일반인들에게 체험이란 이름으로 전해질 때 그들의 목적은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달성될까?
이번 국회 청문회에서 나온 쿠팡 물류센터 심야 배송 체험 제안을 보면서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이 또다시 높은 이들의 면피성 단발 이벤트로 소모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다가 문득 한 사건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참여연대가 실시했던 '최저생계비로 한 달 나기 릴레이 체험'이었는데 참고로 당시 최저생계비는 한 달 4인 기준 136만 3091원. 주거비 8만 7000원에 한 끼 밥값은 2,100원이었다. 당시 이 행사에는 차명진 전 국회의원이 참여했는데 그의 미션은 쪽방에서 하루 식비 6,300원으로 하루를 생활해 보는 것이었다(한 달이 아니다).
그런데 행사의 취지와는 전혀 다른 차 전의원의 소감이 큰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SNS에 '6300원짜리 황제의 삶을 살았다'라고 썼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차 의원은 최저생계비 1일분 6300원으로 800원어치 쌀 한 컵과 970원짜리 쌀국수 한 봉지, 970원짜리 인스턴트식품(미트볼) 한 봉지, 970원짜리 참치캔 1개 등을 산 뒤 "이 정도면 세끼 식사용으로 충분하다. 점심과 저녁은 밥에다 미트볼과 참치캔을 얹어서 먹었고 아침식사는 쌀국수로 가뿐하게 때웠다"라고 적었다. 이어 "황도 970원짜리 한 캔을 사서 밤에 책 읽으면서 음미했고 물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수돗물을 한 양재기 받아서 끓여 놓았다"면서 "이 정도면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초 시민단체가 기획한 행사의 취지는 ‘공감’이었다.
그런데 차 전의원이 올린 6,300원으로 황제의 식사 경험담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감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어진 차 전의원의 글 속에서 최저생계비와 관련한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왜 이것이 가능했을까? 나는 건강하고 또 젊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싼 식자재 정보도 얻었고, 내 발로 몇 번씩 알뜰구매를 위해 돌아다녔다. 최저생계비로 생활하기의 답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최저생계비로 사는 분들께 건강한 삶,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삶, 좋은 정보를 주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게 돈 몇 푼 올리는 일보다 더 힘들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게 답이다.”
즉 최저생계비는 6,300원으로 충분하며 싼 식자재를 살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 (365일, 매일 그렇게 살아도 황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냐는 댓글이 가장 많은 ‘공감’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가 하루 동안 느낀 쪽방촌 체험의 결과물은 서민의 어려움에 공감하지 못하는, 단 하루의 체험을 낭만으로 생각하는, 하지만 서민의 삶을 좌우할 정책을 만드는 사회지도층의 공감 결여 사례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쿠팡의 사례에서도 비슷한 걱정이 앞선다.
1회성 이벤트로 격무에 시달리는 이들의 고통을 체험하고 개선책을 찾아가는 순기능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기회로 삼으려는 것은 아닌지 그 이벤트를 따라가는 수많은 카메라의 렌즈들은 보여주기를 넘어 실상과 대안을 보여 줄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겨우 하루를(혹은 몇 시간 짜인 각본대로) 카메라 앞에서 일해보고 일당을 받으며 이 정도면 황제의 노동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설마가 설마 같지 않은, 공감이 결여된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일상을 보며 ‘설마’라는 단어부터 떠올리게 되는 시민들을 그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테라피스트의 시선_
'잠깐' 들어본 냄비로는 알 수 없는 무게
이번 아나운서님의 글이 유독 날카롭고 울림이 크게 다가옵니다.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거나 섣부른 '낭만'으로 포장하는 행태를 꼬집는 시선. 글을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어요. 특히 "6,300원으로 황제의 식사를 했다"는 대목에서는 씁쓸함을 넘어 깊은 서글픔마저 밀려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쉽게 '대상화'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최근 국회 청문회장에서 쏟아지는 질타 속에 쿠팡 임시 대표가 내뱉은 "함께 배송하겠다"는 호언장담이 유독 서늘하게 다가온 이유도 그 때문인 듯합니다.
잇따른 과로사와 열악한 노동 환경이 문제가 된 현장이 그들에게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맞춰 진행되는 화려한 '1일 체험'과 같은 이벤트 무대일 뿐이라는 것.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생존을 위해 밤새 질주해야 하는 노동자의 절박한 땀방울을 온전히 느꼈다기보다, '생각보다 할 만하네'라는 오만한 안도감과 함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에 들떴던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언제든 그 고단한 '체험'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신이 원할 때 입었다 벗을 수 있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유희'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여기, 도저히 벗을 수 없는 무거운 현실을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바로 그림책 《아나톨의 작은 냄비》의 주인공 아나톨.
아나톨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머리 위로 빨간 냄비 하나가 뚝 떨어집니다. 냄비가 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저 그날부터 냄비는 아나톨과 한 몸이 되어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걸을 때마다 달그락 달그락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툭하면 문턱에 걸리고, 친구들과 뛰어놀 때도 늘 방해가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아나톨이라는 아이를 보지 않고, 아나톨이 힘겹게 끌고 다니는 빨간 냄비만 쳐다보기 시작하죠.
여기서 저는 '진짜'와 '가짜'의 잔인한 차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나톨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빨간 고통의 냄비를 끌고 가지만, 언론과 정치인들은 타인의 고통을 필요할 때만 무대 위로 질질 끌고 와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누군가의 아픔은 잠시 전시했다가 조명이 꺼지면 팽개치고 떠날 수 있는 '소품에 불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나톨의 냄비 소리가 치열한 ‘삶의 비명’이라면, 그들이 고통을 질질 끌고 다니며 내는 소리는 그저 요란한 '노이즈'일 뿐입니다. 진짜 무게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쇼는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요. 지쳐버린 아나톨이 결국 냄비 밑에 숨어버린 것처럼, 이런 기만적인 공감은 오히려 타인을 세상으로부터 숨게 만들 것입니다.
저는 묻고 싶어요.
우리는 어떻게 진짜 공감에 닿을 수 있을까요?
그림책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나톨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사람은 "냄비를 버려"라고 말하거나 "내가 대신 들어볼게"라고 나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아나톨에게 '냄비를 담을 수 있는 가방'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답니다.
냄비는 여전히 아나톨의 삶에 존재해요. 하지만 가방에 쏙 집어넣자 더 이상 다리에 걸리지 않고, 시끄러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아나톨은 비로소 냄비를 지닌 채로도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진정한 공감과 위로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카메라 앞에서 남의 짐을 뺏어 드는 시늉을 하는 쇼가 아닌, 그 냄비가 그저 그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도록, '제도'라는 튼튼한 가방을 만들고 '존중'이라는 완충재를 넣어주는 것. 그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누군가의 절망을 배경으로 삼는 이 차가운 목소리 대신, 우리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아나톨의 냄비가 부딪치는 달그락 소리는 듣기 싫은 '소음'이 아니라, 지금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신호'니까요.
마지막으로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이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과연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그들에게 머물러야 하는지, 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어쩌면 각자의 시선이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라, 타인의 절박한 이야기도 내 안에서는 그저 연기처럼 허무하게 흩어져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깨어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팍팍한 현실을 핑계로 타인의 아픔에 무뎌지지 않기를…
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으며 살 수 있기를...
그리하여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너무 늦지 않게 응답할 수 있기를...
그러한 부단한 노력의 끝에서,
부디 우리의 작은 마음들이 당신의 냄비를 감싸 안을 '따뜻한 가방'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