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여기 있어요
< 당신은 여기 있어요 >
글 라에티티아 부르제 그림 요안나 콘세이요
비룡소
이 그림책은 트레이싱지에
할머니, 엄마 그리고 작가 이렇게 3세대를 거친
겹겹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책으로 출판되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
내용도 세대를 이어주는 내용이기에
세월을 쌓아 올려 만든 그림책과 내용이
너무나도 잘 어우러지는 듯 해요.
아주 얇은 트레이싱지 위에
수놓듯 그려진 섬세한 그림에 시선을 뺏기고
함축적이면서 은유적인 문장들은 가슴을 울리는 책.
“당신은 여기 있어요.
당신은 정말로 여기 있어요.
더 이상 당신이 여기 없던 때부터.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때로는 바로 옆에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당신과 함께 여기 있어요.
자주, 거의 모든 순간에요.”
나와 나의 엄마,
그리고 엄마의 엄마 이야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때로는 바로 옆에 있는 당신이라니..
지금은 곁에 계시지 않아 함께 하지 못하는
나의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친정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던 그 해 겨울,
외할머니도 돌아가셨어요.
한 해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두 분이
한꺼번에 돌아가셨기에 그 해는
깊은 슬픔 속 에서 허우적거렸지요.
늘 세련된 멋쟁이로 흐트러짐 없으셨던 외할머니는
어린 시절의 저와 동생들에겐 늘 자랑스러움이었고
든든함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제가 살아보지 못한
근 100년 전의 이야기를 전개 시키는 것은
늘 할머니였어요.
외동딸로 키워졌던 외할머니는
구두를 신고 원피스를 입으며 공주처럼 자라셨다고,
하인을 부렸고
비단옷을 입으셨고
먹을 것이 수레에 철철이 넘쳐났다고도 하셨지요.
그렇게 할머니에게서 엄마로
엄마에게서 저에게로 옮겨지는 이야기들은
때로는 틈을 서서히 벌리기도 했지만
벌어진 틈이 서서히 메꿔지기도 하며,
화해의 발판이 되기도 했지만
영영 메꾸지 못한 서사들도 있었답니다.
할머니와 손녀는 무조건 내리 사랑이겠지만
딸인 친정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는
상처와 사랑을 수없이 반복 해가며
써 내려갔겠지요.
정정하셨던 외할머니는 넘어지시면서
몇 번의 골절 수술을 받으셨고
그렇게 죽음의 그늘이 할머니를 찾아왔어요.
저에게 할머니의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할머니가 빠르게 늙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근육이 빠져나가 힘이 없던 무릎,
골다공증으로 인해 걷기 힘들어하셨던 모습..
흐트러짐 없이 까맣던 머리는
새하얀 백발이 되었고,
늘어가는 깊고 짙은 주름은
죽음이 할머니 곁을 배회하고 있음을
죽음이 할머니를 협박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지요.
언젠가 글에도 썼지만
돌아가시기 전 사제인 동생에게 고해성사를 받으시고
눈물로 범벅이 되셨던 할머니와 동생의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맑고 푸르렀던 할머니의 지나간 계절을,
거대한 태풍과 같은 삶에서
잘 살아남았음에 감사함을
이야기 하셨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언제나 난 당신을 전해요.
당신을 여럿 만들고 당신을 먹어요.
당신을 소화하고 당신을 잊어요.
그러고는 당신을 다시 발견해요.
갑작스런 순간에요.
아, 그래요. 나는 당신과 함께 여기 있어요.
당신은 우리들 사이에 영원히. ”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 같은 시간이
지금도 흘러내립니다.
제 삶 안에는 친정 엄마의 삶 뿐 아니라
외할머니의 삶이 저에게 각인되어
살아남아 있겠지요.
그러니 세상엔 계시지 않아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
손주들인 저와 제 동생들은 그림책 내용처럼
돌아가신 할머니를,
돌아가신 아빠를,
때로는 기억하고, 때로는 소화하며,
바쁘게 살아가다 잊기도 하겠지만
다시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순간에 말이지요.
여전히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함께 계시진 않지만
영원히 우리들 사이에 함께 살아가고 계심을...
외할머니가 엄마에게로,
엄마가 저에게로,
저는 아들 에게로
그렇게 흐르는 내리 사랑을 증명하듯
얼마 전 어버이날,
엄마 아빠에게는 달랑 커피 쿠폰을 보내준 아들이
할머니에게는 비싼 소고기 쿠폰을 쐈더군요.
할머니의 사랑을 잘 알고 있기에 ㅎ
이처럼 삶은 반복되나 봅니다.
때가 되면 저도 결정적인 장면에서 끝을 맺게 되겠지요.
하지만 계속을 알려주는
시간의 회전목마처럼 되풀이되고 되풀이되어
계속 될 것입니다.
정신없이 사느라
하루하루의 시간에만 주목하게 되는 요즈음,
가끔 이렇게 길고 긴 세월의 흐름도
낡은 사진첩처럼 들춰봐야겠습니다.
생의 시간을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질문,
“ 여러분 곁에도
영원히 함께 살아가고 계신 분이
있으신가요?
그 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증조 할머니, 할머니,그리고
엄마를 거쳐 내게 도착한 이야기.
그렇게 나에게로 삶이 전해지듯
지금의 나도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과거의 무수한 내가 모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듯
지금의 나 또한 과거의 수많은 나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
- 최은영 < 밝은 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