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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안 Jan 05. 2020

그깟 토익 그냥 조지면 되지

하지만 조져지는 것은 나였다

200104 오늘의 실패담


살면서 토익 시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학년 때 토익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그렇게 일찍 준비하지? 어차피 유효기간 만료되면 또 봐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의 내가 들으면 매우 칠 발언이다. 원서 쓰기도 바쁜 시기에 토익 점수 올리겠다고 아등바등해야 한다면 자괴감 들고 즐겁겠다 그렇지.


해외에서 근무하고 싶은 마음 제로, 영미권 문화 호감도 딱히 없음,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시리즈', '트와일라잇' 전부 읽어본 적 없거나 관심 없음. 결과는 국영수 중 영어를 제일 싫어하는 훌륭한 잉글리시 헤이터가 되었다.


그래도 이 학교 다니면 어느 정도 기본 베이스가 있다고 주변에서 힘을 주길래 나도 내 실력을 과신했다. 문제집을 풀어본 결과 반타작을 조금 넘겼다. 학교 졸업 요건으로 제출도 못하게 생겼다.


첫 일주일은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가, 다음 2주는 어영부영 놀았다. 45분 혹은 75분 집중하면 되는데 그게 어려웠다! 단순히 집중을 못하는 문제를 떠나서 문제를 푸는 행위 자체가 보스 몬스터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면 비약일까? 근데 정말 문제 푸는 게 두려웠다.


처음 목표는 980점이었던 것 같다. 그다음에는 그냥 950점 정도로 맞추면 토익 때문에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거라는 자기 위로를 시작했다.(그 성적이 나올 만큼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800이나 나오면 다행일까. 어쨌든 내일 치는 시험 성적을 어딘가에 제출할 일이 없다는 건 확실해졌다. 내 기본 실력과 그간의 공부량을 돌이켜봤을 때 만족할 만한 점수를 가져온다면 그건 양심이 없는 짓이고...


오늘은 시험 치기 전날인데도 모의고사 한 세트를 푸는 게 너무 버거웠다. 새로운 문제 풀이는 고사하고 지금까지 풀었던 문제 오답노트나 정리하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하다가 답답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 어디 안 간다.


과연 나는 자기 전에 오답노트 정리를 다 할 수 있을까? 두 세트 정리에 성공하면 그것도 장족의 발전이라는 생각이 드는, 나는야 말하는 감자.


별 것 아닌 일인데도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유는 정말 힘들기 때문이다. 정말 꾸준히 기력이 없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너무 큰 에너지가 들어간다.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그릇을 설거지하는 일도, 열쇠 복사를 맡기기 위해 밖에 나가는 일도 버거웠다. 별 게 아님을 알고 있는데도.


그래서 정말 오래간만에 자발적으로 운동을 했다. 지금 내 상태는 생수병을 들 근육이 없어 흐물거리는 환자 같았다. 그러니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우면 별 것 아닌 일들을 그 무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릉천을 따라 제기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았다. 이 정도면 시작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저녁을 먹었고, 조금 운동한 게 기분이 괜찮아져서 집에 오자마자 미뤄뒀던 설거지를 했다. 외투를 벗고 고무장갑을 끼는 순간까지 아무 생각 없으려고 노력했다. 뭐라도 생각이 끼어들면 다시 미룰 것 같았다. 어쨌든 설거지도 끝냈다! 마라샹궈는 다시는 포장해 오지 않기로 했다. 기름이 너무 많아.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등받이 쿠션을 샀고(벌써 월초인데 지출이 너무 많아서 큰일이다) 이면지 노트를 꺼내 펜으로 글귀를 끄적였다. 좋아하는 작가님이 적은 트윗.


매몰되기 쉬운 직업이라, 마음이 가라앉을 땐 무작정 밖에 나와서 책을 읽거나, 꽃을 사거나, 걸어가는 신발들을 구경하며 우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다 "지금 뭘 하고 있어?" 묻기도 하면서. 우물 밖으로 나와야 몸이 마른다.


그러다가 일주일 전 풀어놓고 채점하지 않은 RC 파트 5,6을 채점했고 틀린 문제를 다시 풀었다. 정말 자신 없다. 나는 내일도 단어 때문에 골치 아플 것이다. 아, 그냥 내일도 다 빨리 끝내고 집에 와서 다시 눕고 싶다.


출처 모를 용기가 솟아 글을 썼다. 내 감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예전을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다. 토익 공부하기 싫었던 마음이 이 정도나 컸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다 쓰면 나는... 테스트 3의 파트 5,6 오답을 다시 정리할 예정이다.... 테스트 1,2도 동일하게 하면 좋겠지만 지금 기분으로서는 그냥 테스트 3까지도 봐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이고 사소해라.


현재 시각 일월 오일 오전 열두 시 사십이 분. 나는 몇 시간 후 토익을 보러 간다. 그깟 토익 한 번에 조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져지는 건 나겠지. 그럼 다음에 또 시험을 신청하고, 열심히 구르고, 그 실패담을 쓰러 오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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