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lunadelizia Sep 06. 2019

86년생 배우, 최희서입니다.

희서의 書, 첫 번째 이야기

I.     


2015년 새해가 밝았다. 여느 해의 시작처럼, 들뜬 마음으로 직접 만든 프로필 열 부를 들고 논현동과 상암동 투어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어느 영화사부터 돌까… 아으, 춥겠다. 그런데 문득, 앞코가 닳은 나의 최애 부츠를 신고 활기차게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필름*이커스(영화인 커뮤니티)에서 보았던 게시물 제목들이 떠올랐다.      


**역, 20대 여배우 모집
##역, 나이 제한 20-29
주요 여자 배역 모집. 나이 25-28세     

 

잠깐만...? 나 올해 서른...인가?      


1986년 12월 24일생인 나는 2015년에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이 되었다. 억울한 일이었다. 태어난 지 2주 만에 두 살이 된 나는 그렇게 30년 동안 매년 두 해씩 아깝고, 억울했었는데, 특히나 서른, 아니 만 스물여덟인 올핸 더욱 억울한 일들이 많을 것 같다. 모집 유형에 표기된 숫자만 바라보아도 나는 오늘 찾아가고자 했던 영화사 열 군데 중 다섯 군데는 갈 수 없으니. 아니, 간다 해도 그들이 원하는 ‘여배우 모집’ 범위에 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한들 내 연기를 보기도 전에 이력서에 나온 내 나이부터 볼 텐데,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는 할까? 풀이 죽은 내 옆에서 어머니가 불쑥 말씀하신다.   

   

“네가 원래 87년 1월 7일 출산 예정일이었는데… 2주 일찍 나와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태어난 거야.”


“그럼… 난 원래 86년생이 아니라 87년생이었어야 했던 거네?”


“그렇지, 네가 일찍 나와버려가지고…”


1988년 문경이의 크리스마스 이브

    

엄마 배 속에 있었을 때부터 난 성격이 급했구나. 허, 참.

잠깐만… 그럼 내가 정상적인 출산 예정일에 나와서 2주 늦게 태어났다 치면, 난 87년생인 거네. 그럼 87년생이라고 말하고 다녀도… 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잖아?


“…!!”


그렇게 나는 87년 1월 7일이라는, 어찌 보면 그날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출산 예정일 날짜에 감사하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나 자신이 아직 서른이 아니라는 가설에 완벽히 수긍했다. 희망이 보인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고, 파워포인트를 열고,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든 나의 프로필의 가장 윗부분, 생년월일을 희망찬 손가락의 힘으로 꾹꾹꾹, 눌러 삭제했다. 그리고 입력했다. 팔십…칠 년, 일월, 칠일 생. 됐다. 난 올해 스물아홉이야. 나 아직 20대 야, 20대. 사실이잖아, 아직 만 스물여덟인데? 난 아직 ‘20대 여배우’야. 약 5분 동안을 그렇게 컴퓨터 스크린 앞에서 자기 최면을 건 나는, 어딘지 후련한 기분으로 파워포인트의 인쇄 버튼을 눌렀다.      


“최희서 씨 87년 토끼띠시군요?”
“희서 씨 저와 나이가 같네요, 저도 87인데.”
“올해 스물아홉이시구나… 전 아홉수 정말 징하게 왔었는데.”


“아 네~ 맞아요~^^ 팔칠입니다….”


신기한 일이었다. 프로필을 고친 후, 오디션에 갈 때마다 조감독님들은 나의 나이 혹은 생년월일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물었고, 불현듯 들어오는 펀치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네, 네” 답을 하게 되었다. 그 때문일까? 나이 얘기만 나오면 무릎 끝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 사소한 거짓말이 이렇게 가슴 한구석을 켕기게 만들 줄이야. 그러나 과연 그것은 사소한 거짓말이었을까? 그 이후로 나의 2주 늦춰진 생년월일인 87년 1월 7일은 네*버 프로필, 다* 프로필, 나*위키, 나아가 해외 검색 사이트까지 점령했고,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희서 씨 제 후배랑 동갑이던데, 87년생….” 하며 나를 뒤따라왔다. 신기하게도, 이 870107이라는 숫자는 시간이 흘러도 나에게 여전히 낯선 숫자로 남았다. 이제 슬슬 내 진짜 생년월일로 되돌려 놓아야 될 것 같은데… 나는 지인들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왜? 아니 나이 속이는 배우들 많아. 넌 2주 속인 거지, 내가 아는 배우 중에 82인데 87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어.”


“그래도 여배우가 한두 살이라도 더 어린 게 좋지.”      


2015년 1월, 올해도 열심히 활동을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저질렀던 사소한 나의 거짓말은 점점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흐르며, 나에겐 이 고민은 의문이 되기 시작했다. 2주 속이나 5년 속이나 속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 배우는 한두 살이라도 어린 게 더 좋은 거야? 대체 누가 그래? 누가 정한 거야? 그땐 20대 역할 오디션을 더 보고 싶어서 그랬지만 지금은 왜? 아, 더 이상 못 참겠다.     


2019년 1월, 나는 파워포인트를 켜고, 여느 해의 시작처럼 나의 애정이 깃든 프로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지금 나의 선택이 옳은 것이라고.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 숫자에 얽매이지 않을 만큼 네가 잘하면 되잖아? 잘하는 게 중요한 거지. 네가 서른셋이든 서른넷이든 네 연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게 중요한 거야.


내 안에 있던 87년 최희서와 86년 최희서의 다툼을 넋 놓고 지켜보던 나는 에이 될 대로 돼라, 라는 마음으로, 나의 프로필 가장 윗부분, 생년월일을 스르륵 삭제하고, 새롭게 입력을 했다.


생년월일. 팔십육… 년, 십이월, 이십사…일 생.


다른 이름으로 저장.   

   

'2019년 최희서 프로필.pptx'   


이렇게 나의 올 한 해가 시작되었다.     



II.

 

   

“우선은 감독님께만 말씀드리는 거라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어~ 그래, 그래. 나만 알고 있을게.”     


9월을 하루 앞둔 아침 바람은 미지근했다.      


결혼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은 내 결혼. 지난 두 달 동안 조용히, 정말 소리 소문 없이 준비를 해온 내 결혼을 이제 슬슬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때였다.      


가을이 오면, 결혼을 합니다.
저 결혼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 말을 꺼내기가 왜 이렇게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공표가 왜 망설여지는지 정확히 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나이를 숨겨 왔던, 무릎 끝을 보며 망설였던 나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가.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 나이를 먹어서, 결혼을 해서, 연기할 기회가 예전만큼 없을까 봐, 결혼을 한다고 하면 들을 것 같은, 혹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오갈 것 같은 말들을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 듣지 않아도 이미 알 것 같은 표정들과 이미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이 말들을 속으로 읊조리며,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무대에 서서, 나를 지켜보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눈을 질끈 감고 있다.     


“결혼하면 아무래도 여자 배우는 역할이 제한적이지.”


“누가 그래? 왜? 결혼하면 없던 기미가 갑자기 생기니? 갑자기 하늘에서 애기가 떨어져?”


“아니 뭐 그렇잖아, 기사에도 품절녀, 유부녀 대열 합류… 이런 거 나오면 안 좋지 않나.”


“뭐가 안 좋다는 거야. 결혼하는 게 무슨 죄야? 왜 숨겨야 돼?”     


결혼이라는 일은 아마도 살면서 평생 동안 가장 축하받아야 할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자 다짐을 하고, 그 시작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리는 식을 올리는 것. 그들의 축복을 받는 것. 받은 축복만큼 힘차게 웃는 것. 그 어떤 날보다도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꼭 붙잡는 것. 함께 앞을 바라보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상상만 해도, 나에게 곧 그 날이 올 거라는 상상만 해도 벌써 코끝이 찡해지고 입꼬리에 경련이 인다. 너무 좋아서. 아 결혼한다니 너무 좋아서, 내가 당신이랑 결혼한다니 너무 좋아서.     


아!! 너무 좋아!!!!! 생각만 해도 행복해!!!!! 이 좋은 일을!!! 나는!! 왜!!! 숨겨야 되는가!!!!     


감독님과 전화를 끊고, 나는 집으로 향하기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토요 시장으로 향했다. 높아진 하늘 아래, 잠자리들이 하나둘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바람 속을 흐른다. 헌데 나는 이 좋은 날씨에, 이 좋은 일에,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는 것일까. 야채 가게에서 주글주글한 단호박의 껍질을 이리저리 만져보면서도,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두려움인지, 아니 나아가 우울함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억울하네. 나이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내가 왜 숨겨야 되는데? 결혼하면 내가 갑자기 엄청 후져져? 나이 한 살 많다고 갑자기 내가 폭삭 늙어?     


“아저씨, 단호박 어떻게 해요?”


“두 개 삼천 원이요.”


“두 개 주세요. 감사합니다.”     


주말을 맞이하여 슬리퍼를 신고 함께 장을 보러 나온 말간 얼굴의 부부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한 부인과 그 옆에 서 있는 남편은 과일 가게의 사과를 바라보는데, 그들 옆을 지나가자 그들이 뿌린 향수가 새빨간 사과향과 섞여 오묘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나는 그 속을 걸어 나와 집으로 향하며 다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도대체 뭐가 두려운 걸까? 나를 가리키는 그 모든 수식어 이전에 나는 그냥 나야. 결혼을 해도 연기하는 최희서고, 마흔이 되어도 배우 최희서일 텐데. 유부녀, 30대 여배우, 서른넷, 86년 12월 24일생. 왜 수식어에, 숫자에 이토록 동요하는 거야, 나는.


물론, 내가 나이를 숨기게 된 것도, 결혼을 쉬쉬하며 마치 죄지은 것 마냥 조용히 준비해온 것도, 내 탓만은 아니다. 언제나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말과 생각이 있었고, 10년 전부터 마치 스펀지처럼 그들의 평가와 잣대를 쭉쭉 흡수해 온 내가 있었다. 그리고 믿었다. 세상이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들의 말이 옳은 말이라고.      


그러던 내가, 지금 현재, 2019년 8월 31일, 여태껏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전부 돌을 던지고 싶어 졌다. 나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계단 앞에 우뚝 섰다. 안 되겠다. 더 이상 숨기고 싶지도 않다. 아니, 오히려 떵떵 큰 소리로 말하고 싶다. 마치 나보다도 내 미래를 더 잘 안다는 듯한 뭇사람들의 생각과 말에 동요하고 망설이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들이 정의 내린 나의 모습을 받아들일 마음이, 나에게는 애초부터 이만큼도 없었다. 이제 좀, ‘최희서’다워지자. ‘문경이’다워지자.


아, 그동안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나 좀 나답게 살자.     



III.     



나는 계단 위를 우다다다 뛰어오른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단호박이 든 봉지를 식탁 위에 내팽겨 치고, 마약 방석에 드러누워 나를 힐긋 쳐다보는 강아지를 지나 컴퓨터 앞으로 향한다. 목덜미 뒤에 흐르던 땀도 바람에 식었다.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켠다. 지난봄부터 써 온 나의 글들이 담긴 한글 파일을 연다. 삶과 떼놓을 수 없는 직업을 가진 나는, 직업과 떼놓을 수 없는 나의 삶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내 삶에서 내가 숨기는 무언가가, 내가 신통치 않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캐내어야 한다. 그것을 마주해야 한다. 두려워할 순 없다.     


'희서의書0710.hwp'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서 엔터키를 대여섯 번쯤 치고는 백지를 불러온다.


나의 이야기는 2015년, 내가 서른이 된 해의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희서의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1986년 12월 24일에 태어났다. 올해 서른넷이다. 만 서른둘이다. 최희서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최문경이라는 본명을 가진 배우다. 나는 가을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 결혼 이틀 전에는 <아워 바디>라는 첫 주연작이 개봉을 한다.      


나는 이번 가을이, 그리고 결혼 후 맞이할 겨울이, 무척이나, 무척이나 기대된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