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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아 Jan 22. 2024

너희는 절대 이혼하지 마라 8

강요된 용서

  사소한 (때론 커다란) 기억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고, 비수가 되어 꽂혔던 말들은 여전히 아프다. 상처의 흔적도 희미해지지 않았고 난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는 말이 입에서 먼저 나오고 있었다. 괜찮아야 한다는 생각, 괜찮아야만 한다는 당위성, 괜찮다는 되뇜에 나도  모르는 새 세뇌된 말들로 무뎌졌다고 착각했다.  


감정은 감추는 편이 훨씬 편하고 그렇게 지내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괜찮은 척을 해서 나에게 남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저 상대방이 나에게 마음 쓰는 것이 싫고, 나를 불쌍하게 안쓰럽게 보는 것이 싫었다. 그냥 모든 불편함을 막기 위한 애씀일 텐데 그것이 나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속부터 타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왜 그를 만나러 나가는 것일까? 정말로 그가 변했다면 정말 마지막으로 그를 용서해줘야 하는 것일까? 


  여러 물음이 가득한 가운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카페로 나갔다. 의외로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오해했다고, 미안하다고, 한 번만 용서해 주면 다시는 그런 일 없겠다고...... 진심인 거 같은 모습에 마음이 살짝 동요했다. 그를 다시 받아주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아빠가 없는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본다면, 나만 눈감아주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편안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아이들, 친정, 시댁 등......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희생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고구마 100개 먹은 듯한 답답함을 느끼겠지만 나 하나로 이 모든 불편함이 사라진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받아줄 수 없기에 조건을 걸었다. 그 당시 나는 용돈을 제외한 수입의 상당 부분을 전남편에게 이체하고 있었기에 수중에 남은 돈이 없었다. 그가 나를 이렇게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명의로 가진 자산 덕분이었다. 집을 빼서 이사 가겠다고 겁박했었고, 세대주로서 가입해 두었던 청약 저축 통장은 물론 보험까지 모두 해약했던 사람이다. 당연히 이건 처음이 아니었다. 결혼한 지 4-5년쯤 후였던가 아마 그때쯤에도 청약통장 해지 및 보험 해약 등을 자행했는데 나와 크게 싸우고 난 뒤 우리 사이에 미래가 없으니 미래를 위한 이런 것들이 필요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해약했다고 말하였다. 특히 보험은 본인이 사망하고 난 뒤 법정 상속인인 내가 받는 것이니  '남 좋은 일'을 하기 싫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렇듯 크게 다투고 나면 본인의 손해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커다란 협박과 공포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그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고, 나는 그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많지는 않더라도 조금씩 자산을 모아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데 싸울 때마다 스스로 자산을 삭제하는 일이 자행된다면 이 관계에 미래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따라서 내가 내민 조건 중 하나는 이체한 금원을 돌려달라는 것. 입출금 내역서를 보니 금액은 약 1억 원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그래도 나에게 어느 정도 담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금원을 돌려달라는 말을 하자 그의 얼굴에서 미안함이 사라지고 당혹감이 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 이체시켜 준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미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에게 속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이번에는 속아줄 수 없었다. 


"이체 먼저 하거나 수표로 끊어서 직접 줘, 그러면 아이들과 돌아갈게" 


"아니지, 당신이 돌아와야 돈을 주는 거지, 받고 안 돌아오면 나만 개털 되는 건데?" 


  선금(?)을 요구한 것이 못마땅했는지 그의 목소리는 조금 차가워졌다. 


"그동안 당신이 한 행동을 생각해 봐. 나에게 먼저 이행할 것을 말하지 말고, 먼저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줘. 그게 아니면 안 되겠어" 


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곧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그가 빠른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꽤나 큰 쇼핑몰이었던지라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말했다. 잊고 있었던 남자의 힘. 손목이 아프다. 공포스럽다. 어둠이 닥친다. 살고 싶어서 소리를 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하니 그는 손을 놓았고 이내 무릎을 꿇면서 잘못했다고 빌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는 주변 친분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화해를 종용해 왔는데 이제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도 용서를 강요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더욱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도 차를 가지고 왔기에 차량으로 쫓아올까 봐서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돌려 빠르게 이동했다. 그가 나를 찾을 수 없도록 낯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순간 '지잉-' 메시지가 왔다. 


'내가 무릎까지 꿇었는데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 끝없이 흐르는 눈물, 이러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불안감.

그렇게 나는 첫 번째 패닉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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