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가스라이팅
네가 한 달에 50만 원만 벌어오면 내가 집안일 다 한다
태어난 지 1년도 안된 아이를 키우고 있을 때 전남편이 나에게 내뱉은 말이다.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나의 보물과 같은 큰아이를 출산했고 엄마가 처음이었던 나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인생이 180도 바뀌어버리는 과정을 겪으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분유를 먹이면 온몸이 벌겋게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덕분에 완전 모유수유를 했는데 이게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편하면서도 매우 불편하다. 모순된 말이지만 사실이다. 둘째에 비해 예민했던 첫째는 정말로 두 시간 단위로 모유를 먹어야 했고, 태어난 지 6개월이 다 되어서야 통잠을 잤기 때문에 그전에는 제발 6시간만 연속으로 깨지 않고 잘 수 있다면 영혼을 팔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집안살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나의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꼭 해야 하는 것 아니면 거의 손을 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바깥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하루종일 집안에만 있는데 청소 상태라던지 반찬의 부실함에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나도 놀고 있는 건 아니었는데 그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없었다. 젖몸살로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돌덩이 같이 굳어버린 가슴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리는 9살 어린 와이프를 본인의 눈으로 보지 못했고, 아이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톡 하면 부러질 것 같은 아기 다리를 잡아 올리는 순간 뿜어져 나오는 신생아 똥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온 방안을 청소하고 이불 빨래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힘들었다고, 이런 일이 있었다고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눈물이 났다고 말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만 힘드냐? 나는 더 힘들어'였다.
'그래 내가 50만 원 벌고 만다! 그래서 너한테 집안일 다 시킬 거다!'
전남편의 거지 같은 말을 듣고 결심했다. 병신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먹이를 주고 말았다. 뭔가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저 사람은 내가 절대로 한 달에 50만 원을 벌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멍청하게도 그가 본인이 한 말을 지킬 줄 알았다. 완모를 하는 아이를 두고 있는 애기엄마가 한 달에 50만 원을 벌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온라인에서 활동할 수 있는 '모니터'라는 직업(?)을 찾았다. 조금 더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프로슈머인데 기업이 소비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의견을 교환하는 그런 자리이다. 주로 온라인에서 과제를 수행하거나 한 달에 한 번 내지는 두 번, 혹은 간헐적인 오프라인 모임이 있는 일거리이고 보수도 나쁘지 않았다. 매일같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을 이리저리 배분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큰애의 수유텀이 4시간 이상으로 길어진 후 당장 시작했다. 오프라인 모임이 있을 때는 잠시 친정에 아이를 맡기곤 했는데 수유 중이라 조금만 늦어지면 가슴은 돌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아파왔기 때문에 꼭 4시간 안에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주부모니터 일은 생각보다 잘했고 적성에도 잘 맞았다. 몇 군데 회사에 지원서를 쓰고 선정이 되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씩 모니터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 당시의 주 수입원이었다. 목표로 했던 50만 원은 훌쩍 넘기는 금액이었고 금전적인 여유가 조금 찾아왔지만 그는 예상했던 데로 집안일을 함께하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돈을 벌 수 있던 나는 나름 즐겁고 행복했다. 발진이 나는 기저귀 대신 요즘 엄마들 다 쓴다는 군 Goon 기저귀를 살 수 있었고, 백화점에서는 엄두도 못 냈던 랄프로렌 브랜드의 옷을 (세일할 때 직구로) 아이에게 부담 없이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행복했다. 하루가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게 쑥쑥 자라는 아이를 보면서 이 행복이 영원하길 바랐을 뿐이다.
마냥 집에서 노는 거 같은 아내가 일을 하기 시작하더니 기저귀, 장난감과 같은 육아용품을 사달라고 하지 않고 본인 돈으로 알아서 사고, 외식할 때 본인 카드로 결제하니까 기분이 좋았는지 전남편은 가끔 생색내듯 설거지를 하며 집안일을 '도와줬다'라고 으스댔지만 그런 건 딱히 안중에도 없었다. 아이와의 시간은 정말로 행복하니까 남편이라는 존재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첫째와 행복한 3년이 지나고 더할 나위 없이 보물 같은 둘째가 찾아왔다. 나는 정말 아기를 좋아한다. 포동포동한 살과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 작은 손과 발, 아기 냄새 모든 것을 (돌고래 울음만 빼고) 좋아한다. 내리사랑이라고 하더니 둘째는 정말 심장에 해로울 만큼 귀여웠다. 첫째가 투정 부리고 울 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둘째는 울어도 귀여워서 일부러 약 올려 울리기도 해 봤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 세상은 귀여움이 지배한다고 했던가! 자신의 의사표현이 능숙해진 첫째와 귀여움이 한도 초과에 이른 둘째까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고맙게도 둘째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4시간 이상 통잠을 자기 시작했고, 딱히 재우거나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잠들었으며 100일 즈음에는 더 길게 잤기 때문에 육아가 수월했다. 낯가림도 없고 분유 알레르기도 없어서 첫째 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일에 복귀했다. 전남편은 애들을 봐달라고 부탁하면 정말 눈으로만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친정 부모님께 꽤 많이 의지했다. 그렇게 외할머니, 할아버지와 깊은 유대관계를 만들어버린 아이들은 나의 바깥 외출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조금씩 일을 늘려가며 이곳저곳에서 활동을 적극적으로 시작하니 내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부모님께 작게나마 용돈을 드릴 수 있었고, 아이들과 다양한 체험활동을 하러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은 소소하지만 행복했다.
하루는 둘째와 함께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평소에 잘 울지 않는 아이가 귀가 찢어지도록 울었다. 배가 고픈가? 안아달라고 하나? 아픈가? 별별 생각을 하며 아이를 달래고 있었는데 좀처럼 울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열도 없고 기저귀도 갈아주었고 해 볼 건 다 해본 거 같은데 소용이 없었다. 잠투정인가 싶어서 아이를 안아서 달래보아도 여전히 하이톤으로 울어서 잠시 아이를 내려놓았는데 그때 나는 거의 이성의 끈이 끊겼다. 아이의 입술이 보라색이고 얼굴은 시퍼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