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의 세비야>1. 내 이름은 두 개다.

'Luna Han 윤영' 스페인 이름이 생기다.

by luna Han 윤영

내 이름은 두 개다. 스페인 이름 Luna Han, 한국 이름 한윤영.


스페인 세비야에서의 삶은 한국과는 또 다른 인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니까!

2019년 3월 7일, 나는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이제 정말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강아지 다라와 함께였다.
강아지를 데리고 비행기를 탄 건 처음이라 직항이었지만 13시간은 참 길게 느껴졌다.


“다라는 어떡하지?”
이주를 결정하며 조심스레 물었을 때, Ricardo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가족인데, 같이 가야지.”
그 말은 내 마음속 깊이 오래도록 자리를 비워 두었던 단어 하나를 불러왔다

—가족.
그는 내가 기르던 작은 강아지까지도 당연히 ‘가족’이라 부르며 품에 안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갑작스러운 울컥임에 목울대가 저려왔다.


기내에 데리고 탈 수는 있었지만, 옆 좌석 승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내심 걱정됐다.
그런데 고맙게도, 나란히 앉은 아버지와 꼬마 아들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저도 개 키워요. 걱정 마세요. 화장실 자주 데려가시고, 가끔 꺼내주시면 돼요.”
처음 혼자 장거리 비행에 강아지와 잔뜩 긴장해 있던 내게,

그 친절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셋, 스페인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향한 곳은,

Ricardo와 12월에 미리 와서 계약해두고 수리와 인테리어를 준비하고 있던 식당이었다.
거의 다 끝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치 이제 막 시작한 듯한 풍경.
매일 들러 확인해보니,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2시면 인부들이 퇴근을 한다.
하루 5시간. 이래가지고선 1년이 넘게 걸릴 것도 같았다.

스페인어를 못하니, 나는 매일 Ricardo에게 잔소리를 하고, 그는 다시 인부들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밀어붙여 5월 중순, 겨우 식당을 오픈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비자는?

한국에서 주한스페인대사관을 통해 혼인신고를 하고 받은 가족관계부.
나는 그게 비자인 줄 알았다.
도착한 뒤 Ricardo를 따라 여러 서류를 모아 이민청(Extranjería)에 제출하면서야
‘아, 내가 비자를 받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결혼하면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해외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결국 남편 하나만 믿고 이곳까지 건너온 셈이었다.
그 무모한 믿음과 낯선 땅에서의 시작이, 나에겐 또 다른 시험이었다.


비자 발급에 문제가 생겼다.
Ricardo가 다른 나라에서 보낸 20년의 시간은 그에게는 삶의 흔적이었지만,

우리에겐 비자라는 문턱 앞에 놓인 예상치 못한 걸림돌이 되었다.

추가서류를 제출하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화가 난 그의 말투는 단호했다.
“내 나라에서, 내가 결혼해서 와이프 비자를 받는 건데 왜 자꾸 서류를 더 내래?”

하지만 담당자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이민 전문 변호사를 선임했다.
수임료 500유로.
‘좀 비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빨리 비자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괜찮다 싶었다.
가장 궁금한 건, “언제 받을 수 있나요?”였다.

하지만 변호사의 대답은 냉정했다.
“모르죠. 마드리드는 1년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어요. 세비야는 그보단 좀 빠른 편이지만요.”

말끝이 흐려지고, 눈앞이 뿌예졌다.
위장 결혼도 아니고, 진짜 결혼했는데…
그 순간,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건 긴 시간 기다림과 타협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삼켜야 했던 말들과 억눌렀던 감정들이, 그날은 참지 못하고 밀려와 울어버렸다.

식당을 계약했고, 내 이름으로 사업자를 내야 오픈할 수 있는데,

행정 절차의 결과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스페인 행정 시스템에서는 서류 하나 발급받으려면 예약(cita)을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전입신고(empadronamiento) 하나를 하려 해도, cita 예약은 보통 1~2주 뒤.
그때 가서 서류를 접수하고, 접수증을 받고, 필요한 서류는 또 다음 cita 때 받는다.

서류 접수하러 간 날, 나는 담당자에게 조심스레 재촉했다.
그러자 Ricardo가 한국 시스템을 설명했다.
“한국은 바로 가서 서류 받아올 수 있어요. 5분 만에요.”

담당자는 내게 묻는다.
"한국은 여름휴가가 며칠인가요?"

“회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일주일?”

“난 한국에선 못 살아~ 우린 한 달이거든.”
그러더니 직원들끼리 깔깔 웃는다.

‘공무원이면 국민을 위해 일하는 거잖아. 왜 국민이 당신들 스케줄에 맞춰야 하냐고…’

기다림은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일상이었고, 그 자체로 나날의 배경이 되었다.
그렇게, 느림이라는 이름의 이 나라는 이제 내가 살아갈 곳이 되었다.


결국 5월, 그의 명의로 사업자를 먼저 내고, 비자가 나오면 내 명의로 바꾸기로 했다.

비자 문제로 지친 날들이 이어지자,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 비자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어느 날, 그의 친구가 이 얘기를 듣더니 이민청(Extranjería)에서 근무하는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Ricardo가 전화를 걸자, 비자는 그날로 승인됐다.
세비야는 여전히 인맥이 통하는 도시였다.
그간의 기다림은 도대체 뭐였을까 싶었다.

허탈할 만큼 싱겁게, 기다림은 끝났다.

8월 1일, 신분증(TIE)을 손에 쥐고 나오자
그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결혼을 했으니, 결혼비자를 받는 건 당연한 거지만

내 나라가 아닌 여기에서는 끝없는 증명의 연속이었다.
이 당연한 일이 이렇게 ‘감격’스러운 일이 되는 나라, 여기가 바로 스페인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도 이 나라의 삶에 조금 더 익숙해지고 있었다.



� 정보 요약 TIP

비자 승인까지: 평균 2~5개월

TIE(외국인 신분증) 신청: 도착 후 30일 이내 필수

지문 등록 후 수령까지: 약 30~40일 소요

필수 서류: EX-17 양식, 세금 납부서(790-012, 약 €16), 여권 및 복사본, 사진, 주소등록증(empadronamiento)

Empadronamiento: 시청에서 신청, 보통 2일~수주 소요

모든 행정 절차는 Cita(예약제)로 운영됨


다음 화 예고|6월 11일 수요일

〈이혼해도 괜찮아〉 2. 1997년 4월 25일, 첫 만남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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