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나의 화두, 고립과 외로움
12월, 매년 연말에는 각종 시상식들이 있다. MAMA, 가요대상, 연기대상, 연예대상... 올해 읽은 책들 기준으로 내가 선택할 올해의 2022년 대상 책은 이 책 '고립의 시대'이다. 물론 출판은 2021년 11월에 했으니 올해의 책이라고 보긴 좀 민망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어쨌든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뇌리에 꽂힌 책은 이 책이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전자책을 보기 시작한 뒤로, 서점에서 산 몇 안되는 책 중에 하나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때, 코로나를 등에 업고 시대를 잘 탄 책인가 하는 의심이 있었다. 이 책이 코로나로 인한 고립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다룬다면 완독을 안하겠다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첫 챕터에서 작가는 우리의 이 고립, 외로움이 사실은 코로나로 인해서 겉으로 크게 드러났을 뿐, 이미 그 이전부터 고립은 꾸준히 진행되어왔고, 이것이 우리를 좀먹는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첫 챕터부터 마음에 들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이 정도 두께의 책(493페이지)을 단기간에(일주일) 다 읽은 거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다들 90년대 후반 레쓰비 광고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레쓰비 광고는 꽤나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광고, '저 이번에 내려요'라는 희대의 유행어를 탄생시킨 그 광고를 생각해보자. 저 광고가 97년도에,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때 나온 광고인데... 나는 실제로 저때 버스나 지하철에서 저 광고 따라하는 사람들을 종종 봤다. (물론 그때도, 그걸 따라한 사람들은 '얜 뭐야...' 하는 시선을 받았지만) 그땐 그게 어느 정도 허용되고, 가능한 시기였다.
지금 지하철을 타면, 나부터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마트폰을 본다. 이 책도 대부분 출퇴근 시간에 스마트폰으로 봤다. 한마디로, 이제는 우리는 서로에게 눈을 맞추지 않는다. 처음보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경계부터 하고 본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지만, 90년대와 다른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를 스스로 가두게 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은 그 원인,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어쩌다 여기까지 몰렸나에 대한 이야기를 경제,기술,사회,정치적으로 제대로 파헤쳐준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같은 얘기가 조금 중복이 된다거나, 마지막 해결책 부분에서 나오는 해결책이 너무 이상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거나, 한국에 적용될 수 있는 부분과 안될 거 같은 부분이 있다거나 등등 읽다 보면 살짝 아쉬운 부분이 있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 괜찮은 책임에는 틀림없다.
■ 외로운 신체는 심각한 질병에도 취약해서 관상동맥질환에 걸릴 확률은 29%, 뇌졸중에 걸릴 확률은 32%, 임상적 치매로 진단될 확률은 64%나 높다. 외롭다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고 느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조기 사망의 위험이 거의 30%나 높다.
■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렇게 외로워지고 원자화된 이유를 설명해주는 원인과 사건들, 즉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미 짐작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그리고 소셜미디어는 주변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을 빼앗고 우리 내면에 자리한 최악의 것들을 부채질함으로써 분노와 종족주의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또한 우리가 ‘좋아요’와 ‘리트윗’과 ‘팔로’를 쫓느라 보이는 것을 중시하고 강박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효과적이고 공감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갉아먹는다.
■ 세계화, 도시화, 불평등 심화, 권력 비대칭에 의해, 인구구조의 변화, 이동성 증가, 기술 발달로 인한 혼란, 긴축정책에 의해 그리고 이제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불러일으킨 변화에 의해 외로움은 그 형태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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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시대 외로움의 징후는 주변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열망,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 친구가 없다고 느껴질 대의 쓸쓸한 기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우리 시대 외로움의 징후는 우리가 정치인과 정치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 우리의 일과 일터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 사회의 소득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느낌, 스스로가 힘이 없고 무시당하는 존재라는 느낌까지 아우른다.
내가 정의하는 외로움은 단순히 남과 가까워지고 싶은 소망 이상을 의미한다.
■ 나는 브리트니에게 지금까지 그녀를 고용한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나같이 돈으로 우정을 산 사람들에 관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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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서 마흔 살 정도의 외로운 전문직 종사자. 장시간 업무 때문에 친구를 많이 사귈 시간이 없는 사람들.” 브리트니가 대답한다. 휴대전화 화면을 몇 차례 두드리면 손쉽게 치즈버거를 주문하듯 우정을 주문할 수 있다는 것. 외로움을 타는 사람을 지원하기 위해(때로 이용하기 위해) 내가 ‘외로움 경제’라고 부르는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징후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외로운 세기인 이 21세기에는 비단 브리트니가 만난 과로하는 전문직 종사자만 고통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의 촉수는 훨씬 더 멀리까지 뻗어있다.
■ 신자유주의 이념이 오늘날 외로움 위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까닭은 첫째, 전 세계에서 신자유주의 이념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심화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CEO들은 1989년 직장인의 평균 연봉의 58배를 벌었지만 2018년에는 무려 278배를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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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오로지 승자만을 위한 이 사회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자신이 남에게 뒤처진 패자라고, 결국에는 우리 모두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협력자가 아닌 경쟁자로, 시민이 아닌 소비자로, 공유하는 사람이 아닌 축적하는 사람으로, 돕는 사람이 아니 투쟁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했다. 우리는 지나치게 바빠서 이웃과 함께할 시간이 없을뿐더러 이웃의 이름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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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자기본위’의 이기적인 사회,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으리라고 느껴지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외로운 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 이러한 추세는 한참 전에 시작되었지만, 지금의 전 세계적인 감염병 사태가 이를 더욱 악화시킬 위험이 크다. 경제적 위기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깊은 환멸을 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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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관심을 요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최근 목격했듯이 이러한 환경은 극단주의 정치인, 즉 포퓰리스트가 악용하기 좋은 토양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귀는 사람들의 반감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호시탐탐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할 기회를 노린다.
■ 아렌트가 보기에 전체주의는 “외로움을 기반으로 삼는다.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절망적인 경험에 속한다. '나치즘을 추종한 사람들'의 주요 특성은 (...) 야만과 퇴보가 아닌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임을 발견한 아렌트는 “사회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개인적 자아를 투항함으로써 목적의식과 자긍심을 되찾으려 한다”라고 주장한다. 외로움 또는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경험”이 “전체주의 정부의 본질”이며 이것이 “전체주의의 집행인과 희생자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아렌트는 쓴다. 아렌트가 말하는 외로움은 내가 내린 외로움의 정의와 공명한다.
■ 우리가 하루에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평균 횟수다.
시간으로 보면 매일 평균 3시간 15분에 달하고 1년에 거의 1,200시간이다. 10대의 절반 정도가 이제 ‘거의 항상’ 온라인 상태다. 전 세계 성인의 3분의 1이 아침에 눈을 뜬 지 5분 이내로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우리 중 다수가 한밤중에 깼을 때도 5분 안에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 페이스북 삭제는 심리치료를 받는 것과 최고 40%까지 동일한 효과가 있었다.
사실 소셜 미디어의 부정적인 영향력은 이보다 훨씬 더 심층적이다. 소셜 미디어는 고립된 디지털 고치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어 풍부한 직접 상호작용의 기회를 차단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소셜 미디어는 세계를 더 적대적으로, 덜 공감적으로, 덜 친절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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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 플랫폼이 우리가 행복한 순간을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이들 플랫폼은 학대, 괴롭힘, 인종차별, 반유대주의, 동성애 혐오 등 인간 본성에 내재된 최악의 요소들을 전염시키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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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깔린 도덕 원칙은 분열을 조장하고 분노에 찬 메시지를 퍼 나르는 행동에 보상을 주는 동시에 혐오 공동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외로움 위기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름을 끼얹은 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정치 기획이다. 자기 본위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것을 부추기는 이 자본주의는 무관심을 일상화했고, 이기심을 미덕으로 만들고, 온정과 돌봄의 중요성을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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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지난 40년간 우리의 관계를 거래로 변절시키고, 시민에게 소비자라는 배역을 맡기고, 소극과 부의 격차를 갈수록 심화시키며, 이 과정에서 연대, 공동체, 더불어 살기, 친절 등의 가치를, 부드럽게 표현하면 주변부로 밀어냈고 심하게 표현하면 말살했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그 심장부에 돌봄과 온정이 자리한 정치를 끌어안아야 한다.
■ 물론 이 모든 조치를 취하려면 국가는 재원을 더 확보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문제의 규모를 고려할 때 현재 아무리 금리가 낮다고 해도 무한정 돈을 빌리거나 찍어내다가는 장기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폐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이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밖에 없다. 그래야 공평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추기 세금 부담을 부유한 개인에게만 지워서는 안 된다. 세율이 낮거나 제로인 곳에 수익을 심고한 다국적기업들도 그들이 매출을 올리는 국가에 정당한 몫의 세금을 내게 하는 강력한 법안을 도입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비도덕적인 기업 관행으로 공공사업에 투입될 수도 있었던 세금 수십억 파운드가 공중으로 증발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에 특수를 누린 온라인 식품 소매업자에게 우발적 소득에 대한 일회성 소득세를 부과하는 것도 합리적인 조치가 될 수 있다.